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옹호론 (문단 편집) == 원균 맹장설? == 원균 명장설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용맹한 장수였다는 절충안이 나왔다[* 고정욱의 소설 원균에서 이런 관점이 다뤄진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 맹장설에 포함된다. 사실 아예 뜬금없이 나온 주장은 아니고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서 [[류성룡]]이 원균을 두고 그는 용맹하긴 하나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선조에게 아뢴 말에 근거를 둔 것인데, 류성룡의 누구의 친구였지를 생각하면 원균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꽤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원균맹장론자들이 드는 근거이다. 그러나,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 전문이라는 말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다룬다는 서술이 있으며, 전형적인 맹장에 어울리는 인간 흉기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여진족과 매우 잘 싸운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즉, '일신의 용맹은 우수하나 지휘관으로서 미숙해 잘못된 선택으로 결국 큰 전투에서 대패한 맹장' 이미지로는 신립이 훨씬 적절하다. 하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모함을 잘 하는 듯하다. 선조라는 빽을 등에 엎고 일본군을 보고도 안싸우는 등 출세욕이 강했다. 이순신과의 불화로 경상우수사에서 쫒겨나듯이 물러나 육군직인 충청병사로 임명되었던 적이 있어서 그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원균이 선조의 빽을 믿고 출세욕 때문에 고위직만 받고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이 경우는 [[안방준]]이 지은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안중홍]]에게 "적? 그까짓 거 무기로 때려잡다보면 이기는 거잖소?"[*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백병전|맞부딪치는 경우]]에는 [[도검|칼]]과 [[정]](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당연하게도 원균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연히 허풍에 가깝다. 또 [[난중잡록]] 중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용도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으며 80넘은 나이에도 건장함을 과시한 [[염파]]나 하루에 1만 칼로리 이상을 먹는 [[마이클 펠프스]] 같은 여러 운동선수들의 식단과 비교당하며 그의 건장함을 나타내는 내용처럼 꾸며지지만, 원균의 경우는 그 다음 내용이 "[[비만|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다.]]"다. 즉, [[악마의 편집|앞뒤 잘라먹고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단 이건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원균이 비만이었단 기록이 맹장설과 모순되는 건 아니기 때문. 원균의 실제 무덤으로 추정되는 [[통영시]] '엉규이무덤'에 얽힌 일화 중에, [[새마을 운동]] 때 이 무덤자리에서 도로확장을 하던 중 나온 뼈가 매우 장대했기 때문에 당시 통영 시민들이 '이 뼈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필시 장군의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고 하는데,[* [[http://m.gof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 이 일화를 토대로 추정해 보건데 원균은 단순히 살만 뒤룩뒤룩 찐 물렁살은 아니고 상당한 근육질 체형 위에 살이 붙은 [[스모]]선수 같은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궁병|궁수]]가 대부분이던 조선시대 무관들은 죄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시대 군궁과 장력이 비슷한 영국 장궁을 쓰던 영국 궁수의 유골을 보면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의 엉규이무덤 일화에서 언급되는 '장대한 뼈'도 이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원균맹장론과 별개로 원균의 무력이 아예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원균은 무과시험을 첫번째에선 부정입학으로 한번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그 다음 시험에서도 한번에 붙어서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첫번째야 당연히 부정입학이니 한번에 붙었다 쳐도 두번째 무과시험은 어떻게 한번에 붙은 것일까? 부정입학으로 떨어진 전적이 있는 응시생은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독관들이 부정입학 감시를 더 빡쎄게 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원균은 의외로 자기 가문의 빽 없이도 충분히 무과를 합격할 수 있는 기량 자체는 갖고 있었던 거 아닐까 싶다.[* 사실 그의 가문인 [[원주 원씨]] 자체가 전통적으로 무반을 많이 배출한 가문인 만큼 이 가문 무반들의 피를 물려받은 원균이 활도 제대로 못 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일 것이다.] 당시 무과 과목들은 죄다 활을 쏘는 종목들이라 말을 타야 하는 [[기마궁술|기사]]를 제외하면 딱히 몸집이 육중하다고 불리한 과목은 없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1957년 5월 8일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원균이 한 부녀자를 강간하려다 놓친 적이 있어서''' 이 기록 때문에 원균은 여자와의 격투에서도 못 이기는 ㅂ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위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원균은 그냥 비만해서 육탄전은 형편없지만 활솜씨는 무과에 한번에 붙을 급의 실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궁수 자체가 육중한 무장을 하고 굼뜨게 움직이는 병과다 보니 원균처럼 몸이 비대하고 둔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비유한 스모 선수의 경우, 의외로 스모 선수들도 '''분명 근육질인데도''' 격투기에서의 전적은 형편없다는 것은 생각해 보자. 실제로 엎어지면 일어나는 동안 얼굴에 발차기나 주먹이 날아와서 여러번 KO 당한 기록이 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신립]], [[황진]], [[정기룡]], [[한명련]], 유경천[* [[북관대첩]] 문서 참고.], [[정충신]], [[정운]]''' 등 온갖 별의별 희한한 무대포 인간흉기들이 난립하던 시절인데, 원균은 하필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장수라서 상대적으로 더더욱 무력이 초라해 보이는 감도 있다. 사실 일본의 잡병 취급인 [[아시가루]]조차 [[일당백]]의 프로 용병들이었으며 심지어 '[[편곤#역사|명회]]'라는 이름의 한 조선 농민은 [[편곤]] 하나 들고 혼자서 왜군 400명을 쳐죽였다는 괴담같은 얘기도 있고, 단순 지략가로만 알려진 '''[[이순신]]'''과 문약한 이미지가 강한 [[김명원]]은 의외로 둘다 당대의 명궁으로 유명했으며, 하다못해 까이는 [[이일]]조차 혼자서 왜군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다.[* 탄금대 전투로 조선군이 박살나고 도주하는 와중에 일본군과 마주칠때마다 그들을 죽이고 도주했다.] 말 그대로 당시 조선의 [[파워인플레]] 땜에 원균이 저평가받는 것 뿐이지 실제 원균의 무력은 최소한 1인분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일은 신립과 여진족을 토벌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원균의 행보는 맹장과는 1억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로 들면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판옥선을 자침한 사건의 경우, 이때 원균의 판단은 분명히 옳았지만 '''맹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란 문제가 있다.''' 애초에 [[맹장]]이 무엇인가? 앞뒤 생각 다 집어치우고 일단 돌격!하고 보는 게 맹장이 아닌가?[* 물론 맹장이라고 해서 꼭 무지성 돌격만 하는 것이 아닌 돌격할 때를 잘 알고 진짜 돌격할 때 무지막지하게 돌격하거나 그냥 안되면 되게 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하는 타입도 있다. 즉 맹장이라고 다 같은 맹장은 아니다.] 예로 들어 맹장의 대명사인 [[신립]]이나 [[척준경]]의 경우, 이들이 원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무 고민없이 판옥선 끌고 왜선들에게 그대로 돌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신중하게 우선 판옥선을 자침시킨 다음 병력을 데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즉 원균은 맹장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신립]]이나 [[정기룡]]이 진짜 맹장이고 원균은 맹장은커녕 제 목숨만 챙기려던 똥별일 뿐이다. 당장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얼마나 거대한 용맹을 보여줬는지 선조 임금이 직접 [[곤룡포]]를 벗어다가 신립의 몸을 감싸며 치하한 일화까지 있으며 정기룡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조운]]이었다. 다만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조총 대 기병의 싸움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스러운 전투결과일 뿐이지 신립의 용맹이 약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서 신립이 패배한게 자기랑 안 맞는 보직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최고 지휘관으로는 부적합하지만 그런 자리를 맡은데다 기병 전문이라 똑같이 기병전에 능숙한 여진족과는 잘 싸우지만 일본군과는 그 특기가 먹히지 않아서 패배했다는 것.] 되려 녹둔도에서 종군하던 시절 이일의 후퇴명령을 무시하고 남아서 싸워 이긴 이순신과 이경록이 되려 원균보다 더 맹장같다. 적어도 이순신은 도망은 안쳤기 때문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무관 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 다만 이순신이 임진왜란 1년 전 고속 진급을 할 때 반대론자의 주장 중에서 "이순신, 걔는 육지에서만 뛰었는데 바다에서도 잘 뛰겠나?" 임을 생각해보면 따로 두지는 않아도 일단 육군에 맡기면 육군에 수군에 맡기면 수군에 오래 맡기거나 그냥 평생 그렇게 굴린 듯하다. 물론 이순신은 중간에 발포에서 수군 만호를 지낸 적이 있어 완전한 무경험자는 아니긴 했는데 이 때 이순신이 공훈을 세운게 없어서 반대론자들이 경험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훈련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다. 되려 일각에서는 원균이 승마에 능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수군으로 배치됐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고 실제로도 원균이 무과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승마 관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육지로 도망은 갔는데 뭐하러 말 놔두고 뜀박질로 도주했는가도 설명이 된다.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 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 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권력은 맛보고 싶고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은 안되는 인물이 원균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글공부나 열심히 해서 문관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원균의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원균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웬만하면 능력과 상관없이 무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경우엔 예외적으로 대대로 문인 집안에서 무인으로 나온 특이 케이스다.~~그리고 이순신 나오면서 무인으로 강제전업~~] 결국 원균은 관직부터도 가문과 인맥을 이용해 올랐고 그렇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전투지휘관이 되길 고집했다. 거기에 탐욕이 지나칠 정도라서 부하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아 지휘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