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창휘 (문단 편집) == [[태평천국 운동]] == 조직 내에서 위창휘는 [[소조귀]]의 '''천형하범'''(天兄下凡)[* [[예수]]가 소조귀에게 [[빙의]]하여 말씀을 내린다는 것.]에 의해서 정식으로 [[예수]]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라 인정 받았다. 이것은 [[풍운산]]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위창휘는 핵심 간부가 됐고 또한 당시 [[태평천국]]의 정치적 구도로 보자면 소조귀의 파에 들어가게 됐다. 조직의 초창기에는 [[소조귀]]의 권위가 [[양수청]]보다 높았기에 위창휘의 실제 권위나 위세는 종교를 만든 [[홍수전]], [[풍운산]]을 압도할 정도였다. 1850년 7월부터 태평천국은 총동원령을 내려서 신도를 금전촌에 집결시켰고 무장 반란을 위한 준비를 했는데 위창휘는 자신의 집에 있는 12개의 철로(鐵爐)를 이용해서 철을 제련했다. 당시에 [[청나라]]의 관리나 지방 주민들이 태평천국을 수상쩍게 보고 있었기에 위장을 위해 낮에는 농기구를 만들고, 밤에는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조한 칼과 창등을 마을 뒤에 있는 서우담(犀牛潭)에 넣어서 보관했다. 이 무기들은 반란이 시작될 때 우연히 발견 된것처럼 하여 하늘이 태평천국에게 무기를 내렸다고 [[선동]]하는데 활용 됐다. 1851년 1월 11일, [[태평천국]]은 약 20,000명의 인원과 함께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자 홍수전은 지휘를 위하여 스스로 천왕(天王)의 자리에 오르고 각 간부를 오군 주장(五軍 主將)에 봉하니 위창휘는 우군의 지휘를 맏았다. 반란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서 영안(永安)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쫓아온 [[청나라]]와의 영안성 남쪽 수두촌(水竇村) 전투에서 [[소조귀]]가 큰 부상을 입고 천형하범(天兄下凡)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 추측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양수청의 권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소조귀와 가까웠던 위창휘는 양수청에게 밀리게 됐다. 홍수전은 기묘하게도 소조귀의 부상에 대해서는 말 없이 조직 정비에 나서는데 양수청은 동왕(東王)으로 봉해지고 구천세(九千歲)를 받았다. 소조귀는 서왕이자 팔천세를, 풍운산은 남왕이자 칠천세를, 위창휘는 북왕에 봉해지고 육천세를 받았다. 아직 20세 초반에 불과하지만, 전공이 큰 석달개는 익왕(翼王)에 봉해지고 오천세를 받았다. 그리고 홍수전을 제외한 모든 왕들의 지휘는 양수청이 맡게됐다. 이것이 12월 17일의 일이며 '''영안봉왕'''(永安封王)으로 불린다. 태평천국군은 1852년 4월 5일 밤에 영안성을 탈출하여 진군을 시작했고 위창휘 역시 중요 지휘관으로서 나섰다. 태평천국군은 [[구이린|계림]] 공략 실패, 전주(全州)[* 현재 취안저우 시] 점령 후 사의도(蓑衣渡)에서 [[풍운산]]을 잃고 [[창사|장사]] 공략에 실패하고 [[소조귀]]를 잃는 등 고전했지만 기어이 [[호북성]]의 성도인 [[무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라이벌인 [[풍운산]]과 [[소조귀]]가 전사하여 양수청의 입지는 올라가고 위창휘의 권위는 떨어져 갔다. 그 후 태평천국군은 양수청의 건의를 따라서 [[난징시|남경]]으로 향했고 1853년 2월 10일에 출발해서 3월 20일에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남경을 수도로 삼아 천경(天京)이라고 칭했다. 남경을 점령했지만 당시 상황은 좋지 못했는데 [[청나라]]는 당연히 태평천국을 제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태평천국군은 [[베이징]]을 향한 북벌, [[장강]] 일대의 [[무창]], 구강(九江)을 향한 서정을 수행했고 남은 군대는 남경을 방어했는데 이 때 위창휘는 남경성의 수비 및 식량의 공급을 담당했다. 약 3년간 남경은 남경성 근교의 강남대영(江南大營)과 양주(揚州)의 강북대영(江北大營)이 가하는 압박을 견뎌야 했는데 위창휘는 양수청과 함께 방어에 성공했다. 1856년, 태평천국군은 기어이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크게 격파하는데 성공했는데 하지만 위창휘의 활약은 딱히 없었고 오히려 [[양수청]]이 총지휘를 하며 맹활약 하니 오히려 위창휘는 양수청의 권위와 위세에 더욱 눌리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