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특한 (문단 편집) === 독자적 제약 사업 === 1953년 6월, 유특한은 독자적인 제약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유한양행과 결별하고 상호를 ‘유한무역주식회사’에서 ‘유한산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제약경영에 들어섰다. ‘창의개발(創意開發)을 사시(社是)로 정하고 국내 최초의 당의정(糖衣錠) ‘유비타’를 개발 하였다. 1956년, 대한민국 정부는 당의 기술의 국내정착이 가능해지자, 외제 완제품 비타민제에 대하여 전면 수입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두 번째로 개발품으로 결핵약을 생산해내고자 하였는데, 전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결핵을 앓는 환자가 많은 상황이었다. 그는 1955년에 결핵약 ‘유파스짓’을 탄생시켰고 한국 내에서는 전혀 없었던 장용정(腸溶錠; 장에서 용출되는 정제) 기술을 선보였다. 그리고 영양부족으로 병약해진 이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영양소를 공급해 줄 방법을 찾던 중, 한 알만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충족시킬 수 있는 종합영양제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개발된 것이 1957년 6월 당의정 ‘비타엠’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1957년 10월, 비타엠의 탄생과 때를 맞춰 유특한은 회사 상호를 ‘유유산업주식회사’로 개명했다. 이는 유한양행에서 유유라는 상호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유한양행으로 부터의 완전한 분사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어 비타엠의 시리즈제품인 비타엠분말 1962년 발매됐다. 1962년 비타엠 분말을 발매하면서 비타엠은 1억 원 가까운 매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비타민 생산액의 40% 가까운 실적이었다. 비타엠, 그리고 후술할 비나폴로는 유일한 박사의 조언으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 회사와 결별했음에도 유특한과 유일한 박사와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59년 5월,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석수동]])에 안양공장을 준공했다. 안양공장은 [[김중업]]의 설계로 준공됐다.[* 현재는 2006년에 제천에 지은 신공장으로 이사했으며, 구 안양공장 부지는 시에서 인수해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취지에서 [[안양예술공원]] 부지로 편입되었고 이 부지에 있던 구 공장 본관은 [[안양박물관|김중업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1963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스 원료를 생산했다. 1965년 9월에는 한국 최초로 연질캅셀제인 종합비타민 비나폴로를 개발했다. 1969년 7월 19일, 미국 업죤과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관계를 맺었다. 회사명은 한국업죤으로 명명했으며 유특한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유유산업 투자금액은 145,000달러였으며 테포푸로베라외 11개 의약품을 공동생산해 국내에 의약품을 공급했다. 유유는 1974년 3월에 수출입업을 등록했다. 유특한 회장은 과거 유한양행 자회사인 유한무역 시절 닦은 수출입 특기를 살려 활발한 수출을 추진했고, 1975년 11월 수출의 날을 맞아 보건사회부장관상 표창을 수여 받았다. 1973년, 유특한은 사재를 출연하여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에서는 매년 장학생을 선발하여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설립아래 지금까지 1,087명의 학생에게 약 7억 7천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1975년 5월, 노동조합 설립을 계기로 노사 화합 경영을 시작됐다. 노사는 설립 이래 현재까지 무 분규 노사 화합 경영을 이어갔다. 11월에는 [[기업공개]]를 하기 이른다. 70년대 10억원 이상 거대품목은 1976년 17개, 77년에는 25개 품목이었는데 비나폴로는 10억원 판매 의약품군에 들어갔고, 매년 성장세를 이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