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학성 (문단 편집) == 생애 == 1927년 2월 28일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에서 태어났다. 1949년 5월 정훈 제1기로 임관하여 제[[제8기동사단|8사단]]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단국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1965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인사관리처장, 주월 군수사령관, [[26사단]]장을 지냈고, [[1971년]]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여 [[동해안경비사령관]], 육군본부 교육참모부장을 거쳐 [[1977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79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군수차관보[* 이후 국방부 군수본부장을 거쳐 군수관리관(소장)으로 낮아졌고 이제는 공무원(고위공무원 나급) 보직이 되었다. 현 관리관 [[이갑수(군인)|이갑수]]는 예비역 준장에 불과하다.] 신분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있었으며 그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임명직 위원 10인 중 1인이 되었고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6월 육군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하고 [[전두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예편했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있었으나,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경질되었다. 이후 반공연맹(현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 총력안보중앙협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회기 동안 서울올림픽 지원위원장과 민주정의당 국책평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예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해당 지역구의 현역 의원이었던 [[통일민주당]] [[반형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회기 동안 국방분과위원장도 역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의 후신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예천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국방상임위원장을 지냈으나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시행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6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기소되어 제1심과 제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석방되었고 [[대법원]] 상고심 재판 중인 1997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무죄 추정의 원칙]][* 이건 국제 관습에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켜야 하는 원칙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원칙이 깨지는 순간 [[인민재판]]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무죄는 죄가 없음이 아니라 죄가 입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후 이 논란은 역시 반란에 가담한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처장|청와대경호실장]]이 사망한 후에도 다시 이어진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쿠데타]]로 쫓겨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묘소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