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군종합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195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육군]]이 부산의 [[동래여자고등학교]][* 1987년에 금정구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고 현재는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와 [[동래고등학교]]를 징발해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홍일(군인)|김홍일]] 소장이었다. 1950년 9월 당시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중이던 [[갑종간부후보생]]들과 정규 육사 생도 2기생[* 4년제를 목표로 1950년 6월에 입학 했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소총수로 일선으로 끌려 갔다. 그러다 장교의 자질을 갖춘 이들을 재교육 시켜 아예 장교로 만들자는 생각에 의해 다시 소집되어 육군종합학교로 오게 되었다. 이들은 김홍일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입교한 기수이기도 했다. 반면 1년제를 목표로 1949년 7월에 입교한 정규 육사 생도 1기는 전쟁이 터지자 그냥 장교로 임관 시켜 버림. 1955년 이들은 육사 10기로 인정 받았다.(생도 2기는 기수 인정 못 받음)] 일부가 합쳐져서 '육종1기생'으로서 9월 4일 입교했다. 그리고 육사 생도2기 주력은 '육종 2기'가 된다. 휴전회담이 개시되던 1951년 8월 18일까지 6주 내지 9주의 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총 32기까지 임관했다.[* 일선에서 소총수로 뛰던 정규 육사 생도 2기들이 한 두명씩 개별적으로 육군종합학교에 오는 바람에 3기 이후에도 전 기수에 골고루 섞여 있었다.] 전체 인원은 보병 4757명을 포함해 7288명이었다.[* 육종 1기생이 임관한 것이 1950년 10월경으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개입한 때였다. 중공군 2차 공세로 인한 [[1.4 후퇴]], 뒤이은 국군-UN군의 재반격기에도 육종 출신 초급 간부들이 많은 피를 흘렸다. 약 7300명에 달하는 임관자들 중 1300여명이 전사했고, 23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사상률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휴전 후에도 임관자의 36%, 즉 2600여 명이 군에 남아 대위, 중위로 진급했고 중대장, 대대참모, 연대급 이상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한국 전쟁]] 참전자들 중 400여 명이 소령 이상 진급해 1967년 베트남에 파견됐다. 9기 김홍환 장군을 포함해 총 127명이 장군을 달았다. 육종 출신 장교는 198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는 모두 퇴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