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반꼭 (문단 편집) == 1967년 하반기의 격추 행진 == [[파일:4516738.jpg]] 볼로 작전 이후 절치부심하여 새로운 전술을 연마했음에도 921연대의 손실률은 여전히 높았다. 미군이 베트남 공군의 변화에 발맞춰 빠르게 대응한 것은 물론 베트남 공군 지휘부도 적절한 지원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MiG-21 조종사들이 전과 획득의 유혹에 빠져 MiG-21에게 불리한 선회전에 돌입하는 등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7월 중순 회의에서 위와 같은 결론이 내려진 후, 꼭이 다시 격추 기회를 잡게 된 것은 8월 23일의 일이었다. 40여기의 미 공군기로 구성된 대규모 공격편대가 포착되자 요격을 위해 출격한 그는 6000m 고도에서 15km 거리의 미 편대군을 발견했다. 꼭은 올즈와 정면으로 맞붙었던 5월의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멀찍이 돌아들어가 상대 F-4D 후미에서 완벽한 기습공격 위치를 잡은 채 R-3S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정확히 명중해 꼭에게 두 기 째의 격추전과를 안겨줬지만, 그는 기체 손상으로 곧장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꼭 본인은 이것이 아군 [[오인사격]] 탓이었다고 회고했는데, 다른 소스에서는 미사일을 너무 지근거리에서 발사한 탓에 팬텀의 파편이 공기흡입구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1967년 여름 동안 빈도가 확연히 감소했던 미군의 대규모 공습작전은 10월부터 베트남 공군의 미그 기지를 직접 노리는 새로운 전술과 함께 재개되었다. 이에 맞춰 경험을 쌓은 꼭의 격추 기록도 빠르게 늘어났다. 10월 7일에는 껩(Kep) 철도조차장을 폭격하려던 F-105 편대를 요격해 한 기를 격추했고, 11월 18일에는 노이바이 비행장과 하노이 인근 목표로 공습 부대가 가는 길을 뚫기 위해 날아오던 [[와일드 위즐]] 편대를 팜 타인 응안과 함께 덮쳐 각각 전과 목록에 F-105 1기씩을 추가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20일 아침, [[B-66|EB-66]] 격추 임무를 받고 이륙한 응안과 꼭 편대는 둔중한 전자전기 대신 아마 그 호위기였을 F-4 팬텀 2기와 10km 거리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바로 도망친 응안과 달리 꼭은 R-3S를 쏘면서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미사일은 그대로 빗나가버렸고, 이를 확인한 꼭도 즉시 이탈했다. 그러나 이날 응안-꼭 편대의 출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550시경 EB-66의 재밍 개시와 함께 팬텀 4기의 호위를 받는 썬더치프 12기가 옌바이 인근 랑라우 철교를 목표로 접근해온 것이다. 응안-꼭 편대는 다시 이륙하여 썬더치프를 요격, 후미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후 즉각 빠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미사일이 명중했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꼭은 베트남 공군 공인 에이스 파일럿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가능한 응안의 기록과 달리 꼭의 전과 주장은 미군 손실 목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몬순]]철의 악기상 때문에 한동안 잠잠하던 미 공군의 활동은 날씨가 개인 12월 중순부터 재개되었다. 12월 12일 2기 편대의 장기로 이륙한 꼭은 6000m 상공 우측에서 F-105 12기와 F-4 4기 편대군을 발견했다. 요기에게 대형의 꼬리 부분을 맡으라고 지시한 그는 선두 편대의 썬더치프를 R-3S로 공격, 피격당한 기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확인한 후 재빠르게 노이바이 비행장으로 귀환했다. 베트남 공군 공인 6기째의 전과였다. 다만 미 공군 기록에 따르면 피격당한 썬더치프는 손상을 입은 채로 기지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