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재 (문단 편집) === 국회 입성까지 === [[1965년]] [[2월 28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학생 때 [[원주시|원주]]로 올라와 [[원주중학교]], [[원주고등학교]](27회)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금수저]]가 판치는 [[정치인]]들 중 보기 드문 서민의 자녀 출신이다.[* 다만 이광재와 같은 세대의 [[586세대]]의 정치인들은 나라도 가난했고 출세욕이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등 여러 요소로 인해 흙수저 출신 정치인이 매우 많다. 특히 [[운동권]] 출신이 정치 주류이고 이들의 계층도 대개 흙수저였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서 공장노동자로 낮밤을 지새우며 일했고, 학생운동 경력으로 인해 경찰에 끌려간 적이 많은데, 한 번은 취조받던 도중 형사가 [[탕수육]]과 [[소주]]를 시켜줘서 먹다가 "광재야, 내 아들이 [[고3]]인데 (너처럼) 명문대 가려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겠냐?"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 경험은 이광재가 자신을 비롯해 운동권 학생을 탄압하는 악랄한 독재정권 치하의 경찰들이 그저 미워해도 되는 악마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아버지임을 느끼게 했으며, 이런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 경험 때문인지 국회의원 시절 비슷한 출신 배경을 가진 대부분의 운동권 출신 의원들과 달리 보수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의식과 80년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념 논쟁보다는 자기 지역구를 챙기는 일에 더 집중했고 성향이 [[자유주의]]에 가깝다. 보수 싱크탱크의 대표격인 [[여시재]]의 중책을 맡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민주당에서 가장 오른쪽, 중도적이고 유화적인 성향으로 여겨진다. 현역 판정을 받고 징집되었으나 '손가락 절단' 사유로 귀가조치된 뒤 [[병역면제]]를 받았다. 실제로 손을 보면 상처가 있다. 이 면제 사유는 한때 크게 논란이 되었고, 이광재를 공격하는 주요 사안 중 하나가 되었다. '군면제를 위해 고의로 손가락을 잘랐느냐'는 안점이 특히 논란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본인의 일관성없는 해명 때문에 논란이 확대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잠정적으로 '운동권 학생이 입대하면 [[보안사]]에 끌려가 강압적으로 동지의 정보를 불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실제로 당시엔 '운동' 경력이 있는 학생은 입대 후 보안사에 끌려가 정보 창구 및 [[프락치]]로 활용되기 십상이었다.[* [[녹화사업(비밀 공작)|녹화사업]]은 아예 운동권 학생을 군대에 강제로 입대시키는 사업이었고 이 사업의 피해자들은 강제입대 후 프락치로 활용되었다. 강제입대가 아니더라도 신상조사로 대학 시절 운동 경력이 파악되면 보안사에 차출되긴 매한가지였다.] ||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0060302060006200_P2.jpg|width=100%]] ||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0060302050006200_P2.jpg|width=100%]] || ||<-2> 노무현 전 의원의 보좌관 시절 모습. 맨 왼쪽의 인물이다. || [[1988년]] [[노무현]]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이래 보좌진이 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뒤 비서 및 참모로서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희정|좌희정]] - 우광재' 라는 타이틀로 노무현의 최측근이 되었고 지금도 [[친노]]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다만 진보적인 친노 지지층은 이광재가 참여정부를 삼성공화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보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개혁적 성향과 반대로 삼성과 유달리 가까웠던 정권이기도 했다. 친노좌장이자 총리까지 지내는 이해찬 전 총리의 형제가 이해진 삼성전기 사장이기도 했고, 실제로 인수위 시절에 이광재 전 지사는 삼성경제연구소의 각종 보고서를 들고와서 노무현 당선자와 그 주변에 뿌렸다는 건 여러 언론 기사에 확인된다. 이는 참여정부의 아젠다로 등장하는 '동북아 금융 허브', '2만 달러 시대' 등이 모두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과 재벌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권 초기 재벌개혁론자로 유명한 김종인 전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을 후보시절부터 도우며 유력한 경제부총리로 부상하게 되자 이를 껄끄럽게 생각한 재계가 이광재, 이해찬 등 민주당 친노세력들에 줄을 대서 낙마시키고 친재벌 성향이자 경제관료출신인 이헌재를 밀었다는 썰도 있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임명되었으나[[http://news.donga.com/3/all/20030224/7915891/1|#]]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3/1971935_19578.html|#]].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태백·영월·평창·정선]](이하 태영평정) [[선거구]]에 출마,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용학(정치인)|김용학]]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하였다.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참패하였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지만, 2009년 민주당을 덮친 [[박연차 게이트]]로 인하여 수사를 받게 되었다. 정치활동에 있어 '''시한폭탄'''을 안게 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