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택 (문단 편집) === 노동운동 === [[대전광역시|대전]]에서 태어나 진주사범부속국민학교, 통영 충렬국민학교, 거창국민학교를 거쳐 부산 동광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와서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생 시절 국어 담당 신용연 선생님을 따라 [[함석헌]]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광택, “긴 왕따의 시절”, 경기고등학교 63회 동창회 지음, 화동 이후 함께한 50년, 인생 70년 「우리가 빚어낸 무늬 1」, 도서출판 자유미디어, 2020. 2. 20. ISBN 978-89-97467-4 (03060), 76-89면. ]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법과대학생회와 사회법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을 하였다.[*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1970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산화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부채의식과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느껴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https://archives.kdemo.or.kr/oral-archives/view/748]]][*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c5KzNHbgD1s]]] [[장기표]], [[조영래]], [[김문수]] 등과 함께 [[모란공원|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전태일]]의 장례를 치룬 후 본격적으로 투사로서 활동하였다.[* [[https://blog.naver.com/les130/80003831641]]] [[1970년]] [[11월 13일]] 분신 산화한 [[전태일]]을 보러 22살의 동갑 청년 [[이광택]]이 서울 성모병원 영안실을 찾아갔을 때,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가 [[목사]]인 줄 알고 아들을 위해 말 한마디 해주길 청하였고, 당시 대학생 이광택은 요한복음 제12장 제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을 주제로 스피치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광택, “최종길 교수와 함께 한 억압과 저항의 대학 시절”,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 엮음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 - 아! 최종길 교수여」 도서출판 공동선, 2002. 10. 17. 298-312면.] 이후 [[1971년]] [[조영래]], [[이신범]], [[심재권]] 등과 함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 조사를 받고 퇴학에 이어 강제 징집되었다.[*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popArchiveList.do?rfile_no=201104881770]]] 당시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로 입대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그가 속한 "71동지회"는 1971년 교련반대시위로 선포된 위수령에 의해 제적 강제 입영했던 학생운동 리더 그룹 180여명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소개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213951]]]. 군 전역 후, 은사 김치선 교수의 도움으로 재입학을 하여 한 학기 후 졸업을 하였으나, 한국 사회에서의 취업에 큰 제약이 걸렸다. 석사과정 진학 후에는 한국일보(The Korea Times) 기자로 활동하다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간사를 맡아 노동계를 위해 교육활동을 하며 노조 등에 출강하기도 하고 거리투쟁에도 나섰다. 이후 학자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고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http://www.daemuna.or.kr/ko/about-yeohae|강원용]] [[목사]]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을 가게 된다. [[독일]]에서는 브레멘대학교에서 Jürgen A. E. Meyer교수와 [[https://de.wikipedia.org/wiki/Wolfgang_D%C3%A4ubler|Wolfgang Däubler교수]]의 지도 하에 본격적으로 [[노동법]]을 전공하였다.[* 이광택, "노도(怒濤)에 휩싸였던 청년시절", 「계단을 오르니 바람이 새로웠다」 도서출판 자유미디어, 2020. 10. 10. 2판, 40-55면.] || [[파일:20160904_093724 (1) Daubler1.jpg]] || || 2016년 9월 3일 Däubler 선생과 [[튀빙겐|Tübingen]] 역에서 해후하여 근교의 Russlingen에 있는 선생의 자택에서 하루밤을 지새며 추억을 나누었다. Däubler 선생의 집 전체가 서재이다. 부인 [[https://en.wikipedia.org/wiki/Herta_D%C3%A4ubler-Gmelin|Herta Däubler-Gmelin 여사]]는 이 지역 다선 국회의원으로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사회민주당(SPD)]] 부총재와 연방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 해방 직후부터 민주노동운동가로서 평생을 헌신한 [[김말룡]] 선생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선생은 [[민주당(1991년)|민주당]] [[김대중]] 총재 추천 직능대표로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1993년]] 노조화해를 목적으로 [[부당노동행위]]를 하여 물의를 빚은 "한국자동차보험"의 이른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노동위원회]] 돈봉투 매수사건을 폭로하여[* 김말룡, "국회 돈봉투사건 전말은 이렇다", 월간 「노사광장」 1994년 3월호(통권 제41호), 26-31면.] [* [[ https://imnews.imbc.com/replay/1994/nwdesk/article/1921995_30690.html]]]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 큰 활약을 한 분이다.[* [[ http://demos-archives.or.kr/search/115461]]] 김말룡 선생과는 21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친분이 두터워 선생은 서초동 소재 이광택 교수의 산업사회연구소[* 산업사회연구소는 1993년 서초동 우성쁘띠오피스텔에서 설립한 독립연구소인데 2019년 하남시 미사IS비즈타워로 이전하여 존속하고 있다.]를 수시로 방문하여 노동법에 관한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996년]] [[10월 3일]] 김말룡 선생이 등산길에 실족사하자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모셨다. 당시 함께 하였던 [[이용득]], 박석운, 이형진 선생 그리고 이창훈 작가 등과 함께 "김말룡평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24주기에 김말룡 평전.[* 이창훈, 「노동자를 위해 살아온 한편생 김말룡 평전」 학민사, 2020년 12월, 336쪽] 을 간행하였다.[* 이광택, “김말룡 선생 22주기 추모사 - 평전편찬위원회 활동보고,” 「국제노동」 2018년 겨울호(통권 237호), 2018. 12. 1. 1-5면 <여는글>] 1996년 12월 26일 노동관계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로 촉발된 범국민적인 저항에 [[http://www.peoplepower21.org/|참여연대]] 노동관계위원장으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함께 "총파업의 적법성과 개정노동법의 무효 여부”에 관한 시민헌법재판을 개최하는 등[* 이광택, “12. 26. 총파업의 적법성과 개정노동법의 무효 여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공동주최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시민헌법재판> 참고인 진술서 2, 1997. 1. 30. 17-63면.]으로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997년 3월 13일 노동법의 재개정으로 날치기법의 사실상 무효화를 쟁취하는 데 함께 하였다. 2005년~2009년 (사) 전태일기념사업회[* 전태일기념사업회는 1984년 설립되었는데, 초대 이사장으로 공덕귀 여사, 2대 문익환 목사, 3대 김근수 선생, 4대 남상헌 선생, 5,6대 이광택 교수가 선임되었다. 7대 이사장 장기표 선생 당시인 2009년 전태일재단으로 전환하여 2010년 8,9대 조헌정 목사, 2015년 부터 10,11대 이수호 위원장을 거쳐 2022년 12대 이덕우 변호사로 연결되고 있다. [[http://www.chuntaeil.org/]]] 이사장을 맡았는데 취임 첫해에 [[오마이뉴스]]의 협조를 받아 시민모금을 통해 버들다리[* 청계천 6가 소재, 2012.11.2. "전태일다리"로 명명"]에 전태일 동상을 건립하고 주변 청계천변(전태일거리)에 4천여 기부자의 이름과 격문을 새긴 동판을 설치하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187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7595]]]. 전태일과의 인연은 계속되어 2012년 4월 여동생 [[전순옥]]이 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제19대 국회에 진출하자 그의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6년 이래 [[http://www.inkwon.or.kr/|노동인권회관]] 이사를 맡아 주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보호와 처우 개선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 [[파일:allisimin.jpg]] || || 알리안츠생명노조 장기파업 시민대책위원회의 출범(오른쪽 4번째 이광택 교수) || 2008년에는 노조와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임금체계를 변경한 알리안츠생명에서 발생한 파업사태 해결을 위한 시민대책회의 공동의장의 자격으로 활약[*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8406]]][* [[http://m.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1965|매일노동뉴스 기사]]]하여 법원에서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등[* 이광택, "회사의 일방적 성과급제 도입에 반대해 벌인 쟁의 행위의 정당성," 월간 「노동법률」 2009. 4.(통권 제215호) <판례평석> 66~71면. [[https://cafe.naver.com/springandwinter/474]]] 도움을 받은 [[알리안츠생명]] 노동조합이 감사의 표현으로 대책회의의 활동상황을 담은 사진 패널을 제작해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전달하였다고 한다. || [[파일:20200425_162209알리안츠1.jpg]]|| || 알리안츠생명노동조합이 제작하여 수업시간에 이광택 교수에게 증정한 감사 패널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