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택 (문단 편집) === 봉사활동 === [[독일]]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인 1983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맞아 [[https://www.koreanisch-bremen.de/|'''브레멘한국학교''']]를 주말학교로 설립하여[* 최종고 저, 『韓獨交涉史』, 弘盛社 1983 화보에 게재. ] [[파일:temp_1691142957083.1597866584.jpeg]] 현지 교민 자녀와 독일인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를 수학을 하게 하였는데[* [[http://sblog.i-scream.co.kr/ksbremen/3133?sso=ok]]] 2018년 9월에는 개교35주년 행사를 가졌다.[* [[https://vimeo.com/288954322?]]] 사회봉사로는 참여연대 노동관계위원장, [[https://www.ccej.or.kr/|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노동위원장, 경실련 (사)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간병서비스 봉사단체인 다솜이재단 이사장도 역임하였다. 1998년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을 맡아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 도중 의문사한 은사 최종길 교수의 사인을 밝혀[* [[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1707/1]]] 2006년 2월 14일 국가가 유족에게 18억 4800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 [[https://glaw.scourt.go.kr/wsjo/panre/sjo100.do?contId=1982665]]]을 이끌어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A2%85%EA%B8%B8]]][* 법무부의 상고 포기로 이 판결은 확정되었다.] 대학에서 안식년을 얻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후신인 [[http://hamkke.org/|함께일하는재단]] 상임이사로 일하며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기업 육성을 위해서도 진력하였다. 이때 미국, 캐나다, 독일,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선진 사례를 연구하였고,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남아공, 루완다, 남수단, 페루 등지의 사회적기업 육성을 지원하였다. 2010년에는 서울에서 아시아사회적기업활동가대회(ASES)를 주관하였고[* [[http://www.koreatimes.co.kr/www/nation/2010/11/113_77095.html]] [[http://www.koreatimes.co.kr/www/nation/2010/11/113_77226.html]]] 2014년에는 [[http://www.sewf2014.org/|사회적기업월드포럼(SEWF)]]을 서울로 유치하였다. [[국제 노동 기구|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19년]] 한국이 ILO 협약 중 4개의 핵심 협약(Core Conventions)을 비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한국이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들 협약을 비준할 것을 역설하였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21786]]]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우리나라는 2021년 4월 20일 ILO의 강제노동 협약(제29호, 1930),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협약(제87호, 1948), 단체교섭권 협약(제98호, 1949) 등 기본협약 세 개를 비준하였다. 또한 노사간 교섭력의 증대가 한국의 노사 발전을 위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http://www.ej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517]]] 아무래도 노사정 중 정경유착 구조하에서 정부와 기업이 정보를 독점하고 일방적인 회의진행 경향이 강하여 어떠한 협의체가 구성되어도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이 잦은데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근로자이사제 및 최저임금위원회 등 각 정부기구에서 당사자주의의 관철을 위하여 공익위원의 역할 절제 등의 방안을 제안한다. 1975-1976 한국일보(The Korea Times) 기자로 언론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이후 사회운동과 학문활동에 전념하다가 1994년 이후 노동경제신문과 내일신문의 칼럼니스트로, 또 2001년 이후 [[YTN]] 미디어비평위원, [[기독교방송|CBS]] 객원해설위원 등을 역임한 경험이 작용하였는지 2020년 3월 (사)언론인권센터의 제8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0336]]] 기업, 노동계 혹은 관, 각종 법인 및 위원회의 위원직 러브콜을 받지만 교수라는 직업의 소임은 연구라고 말하며 일체 거부하고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항상 연구실에서 연구하는 모습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