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방호 (문단 편집) == 생애 == 1945년 [[경상남도]] [[사천시|사천군]] 삼천포읍 선구리(현 경상남도 [[사천시]] [[선구동]])에서 태어났다.[[http://www.visionkorea.com/vk2008/people/polman.asp?checkpost=checkpost2015&mfldname=will&prm1name=%C0%CC%B9%E6%C8%A3&prm1value=1945%2F03%2F06&prm2name=14342&prm2value=&jcd=&cid=915&partcid=&menuno=1&submenuno=2&page=&memcheck=1234567vs&PHONE_NUMBER=&apgugun=&aprange=&tablename=chulmaja&dbname=voteresult&gourl=&id=&app=&version=|#]] [[부산고등학교]](16회),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과거 김해시장을 지낸 [[송은복]]과 고교-대학 동기다.] 이후 [[삼천포시|삼천포]] 지역 수산업계에서 종사하였으며 1990년부터 1995년까지는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남도 사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황성균]] 후보에 밀려 패하였다. 이후 황성균이 입당하여서 [[지구당위원장]]직을 내 놓아야 했다. 하지만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황성균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1년 한나라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한나라당 원내 지도부 선출 때 [[이재오]] 의원과 러닝메이트가 되어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이 때 대결했던 진영은 [[김무성]] - [[고흥길]] 러닝메이트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로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본선후보로 선출되어 당무우선권을 가지게 된 이명박 후보에 의해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임명[* 한나라당의 당헌 당규상 대통령 선거의 본선후보는 당무우선권을 갖게 되고, 따라서 각종 당직들에 대해서도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당 대표인 [[강재섭]]보다 대통령 후보인 이명박의 권한이 더 강했던 셈. 이후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 후보가 본선후보로 선출되고 나서 [[권성동]]을 당 사무총장에 임명한 것도 본 당헌당규에 근거한 결정이다.][* 본래 사무총장이던 [[황우여]]는 대선 경선 당시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 중립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지만 친이보다는 친박에 가깝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 이방호는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가 원내대표를 하던 시절 의기투합한 정책위의장이었고 경선 당시에도 이명박을 지지한 진성 친이계라고 할 수 있던 인물이었다.]되었다. 이후 [[이명박]]이 17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뤄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사무총장 겸 총선 기획단장으로서 한나라당 공천을 주도하였다.[* 당시 공천심사위원회 간사를 맡으며 같이 친박계 숙청을 주도한 이는 [[정종복]].]그런데 이 때 [[친박]]계 사람들[* 물론 이 때 날아간 사람들 상당수는 3선 이상의 중진들이었다. 이 때 공천에서 탈락한 중진들은 [[친박연대]]를 창당하거나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여 한나라당 후보와 대결했고, 상당수가 승리해서 돌아온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켜서 당 내 반발을 야기하였다. 이 때문에 [[계파 갈등]]이 일어나 [[박근혜]]와 [[친박]]계에 제대로 찍혔고, 자신도 원래 지역구인 사천시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 당시 두 후보의 표차는 겨우 '''178표차.''' 참고로 출구조사는 이방호가 경합도 아닌 넉넉한 차이로 이긴다고 나왔다. 이 때 낙선한 이유 중 하나가 친박계 공천 학살에 반발하여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와 [[박사모]]가 합작하여 야당 후보인 '''강기갑 당선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때 제1야당이었던 통합민주당은 승산이 없는 사천시를 비롯한 서부경남권에 자당 후보를 아예 공천하지 않았다.](...) 이 때 노골적으로 사천 지역에서는 한나라당 유세단이 분열이 되어 있었고, 거기다 구 삼천포시 지역과 통합 이전 구 사천군 간 [[지역감정]]까지 동원되어 있던 탓에[* 이 중에서 이방호는 삼천포 출신이었다. 당연히 구) 사천 출신들은 이방호를 마음에 안 들어했다.], 구 사천군 주민들이 강기갑에 몰표를 주어[* 정확히는 서포면을 제외한 모든 읍면 지역(구 사천군)이 강기갑을, 남양동을 제외한 모든 동 지역(구 삼천포시)이 이방호를 찍었는데, 강기갑이 이긴 동네가 이방호가 이긴 동네보다 더 많았다.] 결국 이방호를 낙선시키고 만다. 그리고 낙선 이후 낙선소감을 취재하러 온 [[유인촌|취재진들에게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https://m.dailian.co.kr/news/view/108113|#]] 이후 친이계의 거물이었음에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구 내 경쟁자였던 [[강기갑]]은 적극적인 의정활동에 힘입어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지만 반면 이방호는 원외 당협위원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잊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방호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3년이 지나고 아무런 임명직을 맡거나 하지 않았는데 당의 비주류였지만 세력이 약하다고 보기엔 어려웠던 친박계와의 공조를 위해서는 이방호의 기용이 어려웠다는 것이 정설.[* 대신 이명박 대통령은 친박계와의 공조를 위해 17대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예비후보 비서실장을 맡았던 재선 의원인 [[유정복]]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일찍부터 친박으로 분류되 [[최경환]]을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입각시킨 것은 물론 친박-친이의 갈등 봉합을 위해 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던 김무성에게 특임장관까지 제의했다. 결과적으로 김무성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장관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김무성은 박근혜와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후 2010년 제5대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했지만 대통령이 밀어준다는 소문이 돌던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선 경선에 뛰어들자 격하게 반발했고 결국 경선 기간 중에 예비후보직을 사퇴했다.[* 정작 이 때 나선 [[이달곤]]은 야권 단일후보였던 [[김두관]]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2011년 1월에 [[자치분권위원회|지방분권촉진위원회]] 위원장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대 총선 출마를 위해 1년만에 사임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선거구]] 통폐합[* 인구비례에 따라 선거구 개편이 이뤄졌는데, 그 과정에서 사천시([[통합진보당]] [[강기갑]])와 남해군-하동군([[새누리당]] [[여상규]])가 합구되었다. 물론 남해군-하동군 현직 의원이던 [[여상규]]가 친이계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하나, 지난 대선 당시의 악감정이 있던 이방호에 비하면 친박계 입장에서는 덜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다.] 등의 이유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그러자 공천 결과에 불복하며 새누리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사천시-[[하동군]]-[[남해군]] 선거구에 출마했다가 새누리당 [[여상규]] 후보에 밀려 또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복당을 신청했으나 복당을 보류(사실상 거절)당했고[[http://news.donga.com/HUB/common/device.php?u=http%3A%2F%2Fnews.donga.com%2F3%2Fall%2F20130410%2F54322390%2F1%3F|#]], 2년이 지난 2014년에야 복당에 성공했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8421410|#]]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예비후보 등록은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출마를 포기하였다. 이후 나이도 칠순을 넘긴 고령이다 보니 사실상 정계 은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딸인 이지현이 바른정당을 거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친이계 정치인이면서도 의원직을 야당시절에 지냈던 인물. 정작 정권을 다시 가져온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오랜 시간 야인이었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야인이었다.(...) 이유야 당연히 위에 언급한 박근혜와 친박에 찍혔기 때문. 2016년 총선 불출마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가 유튜브에 근황이 공개됐는데 색소폰 연주에 빠진듯 하다.[[https://youtu.be/6Lf4ICtt0e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