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철 (문단 편집) == 여담 == * 가끔 인터넷에 이병철이 [[이완용]] 후손이라는 [[http://blog.daum.net/miirkorea/4308245|포스팅]]이나 그림이 떠돌기도 하는데(디시인사이드 [[정보전사]] 글이라든지),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기업가 이병철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이완용은 우봉 이씨, 이병철은 [[경주 이씨]]라서 본관부터 다르다. * 막내 딸인 [[이명희]]를 유독 예뻐했다고 했다. 그녀의 오빠 [[이건희]]가 이명희를 두고 "장미처럼 자란 막내"라는 표현을 할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명희는 이후 [[신세계]] 회장이 되어서 보인 뛰어난 경영능력 덕분에 리틀 이병철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http://www.greenpos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217|#]] * [[정주영|대표적인 재계 라이벌]]보다 여자 관계는 점잖았다지만, 그도 자유롭지는 않다. 4녀는 대구 삼성상회에서 만난 [[박소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인 소실인 구라다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가 있었다. 말년에는 박모씨가 오랜 기간 옆을 지켰다고 한다. 그 중 일본인 처인 구라다 여사가 유명하다. 장남 [[이맹희]]의 자서전에 의하면 본인과 남동생 [[이창희(기업인)|이창희]]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그 소실 집에서 지냈는데, 두 사람이 너무 많이 먹어 생활비가 부족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던 와중[* 본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계란]] 한판을 하루만에 다 까먹은 일로 크게 다투게 되고,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매타작을 당한 뒤 한국으로 강제귀국하게 된다. 두 아들은 귀국 후 친모이자 이병철의 정실인 [[박두을]]에게 그간 일을 고했고, 평소에도 [[장남]] 사랑이 지극하던 어머니 박두을은 소실의 행동을 매우 괘씸하게 여겨 격노했다고 한다. 당대 제일 부호의 가족사였던 만큼 세간의 관심이 컸으며, 훗날 [[김영하(만화가)|김영하]], [[박봉성]] 같은 만화가들이 여기서 모티브를 딴 기업 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말년에 함께 살았던 박모씨의 아들인 임씨는 일인시위, 책출판 등으로 삼성가를 머리 아프게 하기도 했다.[[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62|#]] * 사망 한 달 전 [[천주교]] [[절두산]]성당 [[신부]] 박희봉(1924~1988, 세례명 이시도로)은 이병철의 요청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한다."는 말과 함께 당시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정의채[* 이병철의 형 이병각을 임종 전 천주교로 귀의시킨 신부이다.] [[몬시뇰]]에게 만남을 주선했고, 정 몬시뇰은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보단 사전에 문제점을 정리해서 보내주면 심도 있게 답변해주겠다고 하자 이병철은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까지 여러 [[철학]]적 질문을 A4용지 5장 분량으로 작성해 답을 구했다고 한다. 정의채는 답변을 정성껏 준비한 뒤 이병철을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지만, 이병철의 건강이 악화되어 답을 듣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고.[* 정 몬시뇰 본인 말론 이병철이 [[세례]]를 원했다고 하는데, [[원불교]] 신자였던 이병철이 진짜 세례를 원했는지는 미지수.] 참고로 이병철은 [[유교]] → [[불교]] → [[원불교]] 신자였다. * 1980년대 한국 3대 부자였다. 당시 한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단 3명이었는데, 바로 이병철과 [[정주영]], [[신격호]].[* 다만 [[포브스]]는 [[재일교포]] [[신격호]]를 일본인 시게미츠 타케오로 분류했다. 참고로 [[신격호]]는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버프로 세계 부자 순위 '4위'였다고. (9위였다는 말도 있다.) 다만 당시 롯데가 그정도로 잘나가던 기업은 아닌지라, 이는 신격호의 부동산 가격이 버블이 끼면서 급상승한 영향으로 봐야 할듯 싶다. 실제 버블이 꺼지며 이후 자산이 많이 내려가고 이 중 상당 부분을 또 자식들에게 물려줘 2010년대엔 국내 40위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 이병철은 이미 해방 전후 조선인 최고 부자 중 하나였고, 해방 이후에도 1960년대부터 오랜기간 재계 1위 자리를 고수했다.[* 말년엔 [[정주영]]의 현대에 뒤진 적이 있긴 하다.] 그래서 부자의 대명사로 그를 뜻하는 돈병철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 성격이 깍듯한 12살 차이나는 [[동생]]인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를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1981년 김종희가 급작스레 사망하여 장남 [[김승연]]이 29살의 나이로 회장직에 올랐을때 이병철이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 [[영남]] 출신이라 [[호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루머도 있으나[* 인터넷 댓글창 등을 통해 이병철이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가 사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으나,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이병철이 직접 며느리감으로 낙점한 [[홍라희]]부터가 전북 전주 태생이다.]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도 호남 지역 수재들이 삼성 임원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사장단에 새로 발탁된 몇몇 호남 출신 인사들은 이병철 시절에 입사해, 성과를 쌓아 임원까지 승진한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세간의 루머와 다르게 의외로 지역색이 옅었다며 놀라워했다는 후문.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리 회사에서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지역 단위에서부터 파벌이 갈라져 버리면 회사 분열은 순식간이므로 지역 감정을 줄이는 것이 도덕성 이전에 경영 면에서도 좋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에서는 얼마나 일을 잘 하느냐가 문제지 출신 지역 같은 건 상관없기 때문이다. * 2015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의 비즈니스 선구자 50인'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다.[[https://mnews.joins.com/article/17494611#home|#]] * 1983년에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잡스]]와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잡스는 [[태블릿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삼성이 그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협력사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 것. 이병철은 스티브 잡스와의 만남 이후 그에 대해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https://techit.kr/view/?no=20200826161200|#]] *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니라 [[도쿄]]의 한 골목에 있는 어느 개인 양복점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 개를 사서 쓰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을 정도로 '일류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위 내용은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도 탑승감이 좋은 독일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만 쓴다고.[* 사실 여부를 떠나 탑승감 이외의 문제도 있는 것이, 국내에서 사업한 외국 엘리베이터 업체로 저명한 것은 [[OTIS]], [[티센크루프]], [[미츠비시]]를 꼽을 수 있는데, 미츠비시는 한국시장에서 철수했고, OTIS는 LG와, 티센크루프는 과거 동양엘리베이터와 합작해 들어와 각각 LG-OTIS, 티센크루프-동양으로 영업했다. 국내 업체로는 [[현대엘리베이터]]가 있으므로, 운영진으로써는 경쟁사 제품을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이병철은 평소에 일본의 경제 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를 만나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 "하세가와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B&nNewsNumb=202012100013&page=1|#]] * 경남 [[의령군]]에서 가칭 호암문화예술제를 개최하기로 하면서 그 홍보를 위해 2021년에 '호암이병철대로', '삼성이병철대로'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바 있다. 해당 행사는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이라는 명칭으로 이듬해에 개최되었다. * [[불혹|40세가 되는 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다만 1970년대에 고등학교 진학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남자도 20대 초반 정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이전에는 40대에 할아버지가 되는 일이 제법 흔한 일이긴 했다.[* 같은 세대인 LG 창업주 [[구인회(기업인)|구인회]]도 만 38세(...)에 할아버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