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철 (문단 편집) === 유년~청년기 === 1910년([[융희]] 4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태어나 천석꾼의 집안에서 꽤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일본 중산층 5인 가족의 한달 생활비가 한화로 환산하면 50원이었는데, 이병철은 일본 유학 당시 부친으로부터 매달 '''200원'''을 송금받았다고 전해진다.] 1922년 3월 지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그해 9월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으며[[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00915000184|#]],1926년 열일곱의 나이로 3살 연상의 아내 [[박두을]]과 혼인했다.[* 여담으로, 이땐 박두을 집안 쪽이 이병철 집안보다 더 부자였다고 한다.] 1929년, [[서울]] 종로의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를 26회로 졸업하고 이어 1930년 4월에 [[와세다대학]] [[부속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으나, 일본 유학 생활 중 건강 악화로 1934년 중퇴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본인은 훗날 학창 시절에 대해 중퇴하긴 했지만 수학은 제법 했으며 지는 걸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했으나,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백수|직장없이]] 지냈다.[*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 내용에 따르면 취직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걸로 봐서,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을 세워두고 상경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豚)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러다 이웃 친구들과 [[도박]]의 일종인 [[골패]]에 빠졌다. 즉, 뭔가 위인스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과 달리 이병철의 20대 젊은 시절은 꽤나 [[한량]]이었던 것.[* 여담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엔 지식인 중 시대를 한탄하며 무기력해하다 이런 식의 한량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 걔중엔 [[김용환(1887)|김용환]]처럼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다 네 아이[* [[이인희]], [[이맹희]], [[이창희(기업인)|이창희]], 이숙희.]의 아버지가 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자책하고 밤새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다 결국 사업으로 방향을 정한다. 훗날 이병철은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