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철 (문단 편집) === 사카린 밀수 사건과 후계 구도 === 우여곡절 끝에 [[울산]]에 100만 평 부지를 매입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 완공된 즈음인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 1966년 9월의 소동에 대해 <호암자전>과 <묻어둔 이야기>는 모두 "정치자금 등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의 결과"라고 적고 있다. 군사정권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쪽이,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사카린 밀수 사건'을 언론에 제보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국민적 공분이 일고 당시 정권도 공범에서 심판자의 입장으로 돌변하자, 이병철은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차남 이창희는 사실상 아버지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 1년 좀 안되서 출소한다.],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현 [[롯데정밀화학]])과 [[경주 최씨]] 가문으로부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85.html|기증받은]] [[대구대학교]][* 지금의 [[대구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이며, [[영남대학교]]의 2개 전신 중 하나이다. 현재의 영남대학교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사실상 강제 통합한 학교다. 그러니 "한수(漢水) 이남 제일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병철 입장에서나 선뜻 대학교 운영권을 넘겨준 최씨 일가 입장에서나 당황스러울 법 하다.]를 정부에 넘기게 된다. 이병철 장남 [[이맹희]]에 의하면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당시 정권이 정치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삼성의 밀수를 눈 감아주는 한마디로 공범이었는데, 정작 여론이 난리가 나자 정부는 뒤통수를 쳤고 덕분에 삼성 혼자 독박 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삥]]까지 뜯겼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맹희는 당시 삼성과 정부의 관계를 '짧은 밀월, 긴 갈등'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맹희의 회고록이 거의 유일한데, 그 외 회고록을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 보고서가 있다. 보고서를 보면 한국비료 국가 헌납 1년 뒤인 1967년 9월 11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로버트 메이어 상무담당관 등과 만난 이맹희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국 정부의 제안에 따라 진행된 일이며, 삼성은 중앙정보부 등의 협박에 못 이겨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맹희는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대가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에 매달 정기적으로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가운데,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게 되는 진퇴양난까지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한국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는 방안까지 건의했다."는 구절도 있다.] 당시 한국비료는 첫 해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액의 30%에 이를 정도로 삼성 입장에서도 알짜배기 기업이었다.[* 한편으론 그런 기업과 대학을 책임을 진다면서 사회 환원도 아닌 [[정부]]에 준다는 것도 선뜻 이해가 안가는데, [[이맹희]]에 의하면 당시 [[이후락]]이 찾아와 대학교를 넘기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가 대통령 퇴임 후 해당 대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독재로 나아가면서 붕 뜬다.) 결국 살려고 울며겨자먹기로 일종의 뇌물을 바친 셈. 사족으로, 이때 헌납한 한국비료는 1994년 [[이건희]]가 2,300억 원에 다시 인수했고, 영남대학교는 지금도 박정희가 사학주처럼 취급받고 딸 [[박근혜]]가 [[이사장]]을 맡는 등 영향력을 행사해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 명목상 직책은 부사장이었지만, 총재 소리를 들으며 일종의 대리청정 체제로 실권을 휘둘렀다. 실권 행사 기간에 대해선 이병철, 이맹희 측이 서로 말이 다른 편인데, 당시 실권을 행사한 기사 등을 보면 이맹희 측에 무게가 실리나 이병철도 활동을 아예 안한건 아니라 일종의 공동 경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때도 이병철은 회장직은 유지하며 복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병철에게 밉보였는지 70년대 들어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기업인)|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이병철도 나름의 고민은 있었는지, 이맹희와 이건희를 두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으며 특히 [[박두을]] 여사가 이맹희를 아껴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맹희와는 사이가 멀어졌지만 손자인 [[이재현]]은 죽을 때까지 이뻐해 삼성그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제당]]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CJ]]가 존재하는덴 알게 모르게 박두을 여사의 도움도 있었던 모양.[[https://m.mt.co.kr/renew/view.html?no=2022110519514988852|#]]],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1976년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사족으로 감옥까지 갔다왔지만 자길 홀대하는 아버지에 분노한 이창희가 1969~1970년 무렵 정권 인사들을 끼고 부친을 몰아내려는 쿠데타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연히 눈밖에 난 이창희는 그룹에서 쫓겨났으나 3년이나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용서를 받았고, 이병철은 차남이 산하의 몇몇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맹희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물증은 없었고 본인도 죽을 때까지 부인했으나, 이병철의 의심을 사 결국 사이가 갈라졌고 용서도 구하지 않아 호암이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설도 있다. 훗날 이맹희는 198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사한 건 이병철 사후 이건희 체제가 확립된 1993년이다. 참고로 이때 형제간에도 사이가 틀어졌는지 2010년대 이맹희, 이건희간 유산 상속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6년 대한암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삼성의료원|고려병원]]을 설립했다. 대구대학은 포기했지만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4년에는 [[울산]]에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했고, 1977년에는 조선소를 인수하여 조선업(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도 뛰어들었고, '[[삼성물산 건설부문|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도 설립한다. 방위산업에도 진출하여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을 설립했다. [[GE]]와의 기술제휴로 소위 '제공호'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국산 [[제트전투기]]인 [[KF-5]]를 생산한 것이 삼성테크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