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철 (문단 편집) === 인재 관리 === >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 "나는 경상적인 사업의 사소한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다만 유위한 인재를 찾아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왔을 따름이다." >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데려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상기한 서울 탈출 당시 운전사 위대식 건도 그렇고,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한 이창업이[* 처음엔 이병철의 [[와세다대학]] 선배 이순근이 전문경영인을 맡아 삼성상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지만 월북을 했던터라, 이 시점에서는 이창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서울 사업으로 신경쓰지 못한 몇 년 동안 대구 사업장에서는 청주(淸酒) 월계관과 사이다 판매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史)>[* 28살에 요절한 일본의 여자 공장 노동자가 1925년에 쓴 책으로, 당시 일본의 공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노동 환경과 식사, 주거 환경 등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도 제대로 먹지 못해 책이 나오는 해에 사망했다.]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54년 [[제일모직]] 공장을 [[대구]]에 세울 때 공장보다도 기숙사를 먼저 세웠는데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의 기숙사였으며,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오고 [[목욕탕]], [[세탁]]실, [[다리미]]실, [[미용실]]이 있는 등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급여 또한 좋아서 당시 제일모직 근로자의 증언에 따르면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 가능했다고 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카더라]]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 [[삼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 관상가가 강연 자리에서 밝혀 세간에 알려졌다.]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선우용녀]]가 먼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이병철이 소유한 TBC 방송국 전속 무용수 시험[* 서라벌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였는데 담당교수였던 최영남의 강한 요구로 시험을 봤다고 한다. 선우용녀는 고등학교때까지 서양무용([[발레]])을 하다가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연극과에 갔던 거라서 더 이상 무용은 하기 싫다고 말했지만 최영남이 너는 지금 방송국 무용수가 되어도 곧 거기서 연기를 할 운명이라고 말하여 혼을 내며 무조건 시험을 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수가 은인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합격하자마자 바로 "상궁나인"이라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뽑혔다고 한다. 왕 역할의 [[이순재]]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는 "나인"(궁궐의 시녀) 역할이었다.]에서도 이병철이 관상가를 데리고 와 직접 면접을 봤다고 한다.[* 당시 선우용녀를 얼굴 앞뒤옆만 카메라로 찍어보더니 무용도 안시키고 나가라고 한 뒤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선우용녀는 그전에 다른 후보자들은 그 면접에서 다 무용 시범을 했기 때문에 본인은 떨어진 줄 알았다고 한다. 알고보니 관상만으로 합격시킨 것이었다.] 방송국 직원 면접에서도 회장이 직접 와서 그랬을 정도면, 다른 회사 면접 역시 관상가와 이병철이 면접을 다 봤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1965년에는 [[5.16 군사정변]] 직후 처형당할 뻔한 [[홍진기]]를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드는[* 다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는데, 다른 언론사에선 집중 견제를 받았기 때문. 사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커진 것도 이때 앙심이 생긴 다른 언론사들이 집중 저격한 탓도 있었다.]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이맹희 회고록에서 따르면 친했다기보단 '아버지(이병철)과 일민(홍진기)은 서로를 어려워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민이 후계 구도에 간섭했다는 주장에 대해 일민은 그런 짓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애초에 아버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남의 조언을 듣고 판단할 사람이 아니라고 [[음모론]]을 일축했다 ], 나중에는 맘에 들었는지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 [[홍라희]]다. 때문에 이후 이건희 후계 체제 과정에서 홍진기가 이병철에 영향력을 행사한거 아니냐는 루머도 있지만, 피해 당사자인 이맹희부터가 음모론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애초에 후계 구도 관련해선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됐다.) 상기되어있듯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굳이 영향력 행사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면 장인이 경영 수업을 해준 것 정도인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 한다. [[신현확]] 관련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신현확은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을 맡아 [[4.19 혁명]]이 일어난 이후 체포되었다. 당시 분위기상 신현확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신현확이 체포되기 전 이병철에게 전화하여 [[돈]]을 요청했는데 이병철은 신현확이 끈 떨어진 연 신세임에도 이를 들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수십년간 이병철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집권하고 장남인 [[이맹희]]의 경북고 동창들이 요직에 앉아 이제 친구 맹희에게 삼성을 되찾아 주겠다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러자 후계 구도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한 이병철은 1986년 신현확에 전화하여 삼성물산 회장직을 권유한다. 처음 신현확이 [[거절]]을 하자 이병철은 "[[빚]]을 이제 갚아 주셔야겠습니다"라고 처음으로 그 일을 말하며 설득을 하였고 신현확은 그제서야 삼성물산 회장직을 수락했다. 당시 TK 인맥의 대부격이던 신현확이 버티자 이후 신군부 세력들은 삼성의 후계 구도 개입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9/2014051901442.html|#]]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