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애라 (문단 편집) == 생애 == 1894년 1월 7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이춘식(李春植)의 셋째 딸로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5076|태어났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직을 맡다가, [[이규갑]]을 만나 20살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라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공주시|공주군]] 지역에서 교사직을 하게 된다. 이규갑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교편을 내려놓자 이애라도 이에 따라 교편을 내려놓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게 된다. [[3.1 운동]] 당시에는 애국부인회를 지도해서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출옥한 후 다시 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이번엔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헌병이 쳐들어와 이애라의 100일 된 아기를 다짜고짜 땅에 내동댕이쳐 즉사하게 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당하고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이 무렵 남편 이규갑은 이애라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해 한국[[독립군]]사관학교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했다. 이 때문에 이애라는 출옥한 뒤에도 남편의 행방을 시도때도 없이 추궁당했다. 견디다 못해 [[아산시|아산]]으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오래 버틸 수 없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한다. 이애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함경북도]]까지 갔다가 거기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다시 고문을 받는다. 계속된 고문으로 이번에는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기에 일제는 의사를 불렀고, 천운으로 부른 의사가 이애라의 큰조카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모르는 척 하며 "상태가 위독하니 격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해 이애라는 석방될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애라는 다시 상봉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 이 말을 하고 며칠 뒤 후유증이 겹쳐 숨을 거뒀다. 사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충남 아산의 충국순의비에 이름이 새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