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학영 (문단 편집) == 생애 == [[1952년]] [[4월 16일]],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에서 태어났다.순창 쌍치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부친이 별세하자 고향인 풍산면 유정리로 이주하였다. 이후 순창중학교와 [[순창제일고등학교|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한동안 대학에 진학치 못하였다. 대신에 [[전북일보]]에서 1년간 신문배달원으로 일하고, 전주 노송동에 있는 인쇄소에 가서 틈틈이 [[필경사]] 일을 배웠다. 그 후 조금 늦게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학생회장 활동 중에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https://www.ymca.pe.kr/1348|#]] 학창시절에는 516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절까지는 사실 자신에게 장학금을 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가 고교 시절에 [[공무원]]이나 [[군인]]이 되어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대학에 가서 3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고 [[학생운동]]을 하게 되다가 국가권력에 핍박받게 되면서 그 뒤로 계속 [[운동권]]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학생운동은 의도치 않은 계기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평소 데모같은 것에도 별 관심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가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것이 학생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서 공무원을 꿈꾸면서 학생운동을 멀리했던 시절, 다른 남학생들이 죄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생회장을 떠맡았는데, 이 때문에 수사관에 잡혀가 각목으로 구타를 당하고 손발과 손가락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씌워서 [[물고문]]을 당하고 [[구속]]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풀려난 후 국가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통곡했다고. 이 사실은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때 본인이 밝히면서 널리 알려졌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국호를 비하한 조직이다.](약칭 남민전)에도 가담하였는데 이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당시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국가단체]]로 분류되었다. '''총기를 비축하고, 사제 폭탄을 제작하며 무장혁명을 준비'''하던 70년대 말 [[민투위 강도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이 되었는데, 당시 남민전은 '혁명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자택에서 '''[[강도죄|강도]]'''를 시도하였다. "강도야"라고 외치는 [[경비원]]을 '''칼로 수 차례 찔러''' 강도상해죄로 2년 징역살이를 하였다. 27세였던 이학영은 당시 25세였던 차성환과 [[절도죄|절도]] 선두대였는데, 회고 인터뷰에서 차성환은 현관문을 열자 "강도야"라고 외치는 [[경비원]]을 차성환 자신이 과도로 찔렀고 곧 경찰이 출동하였지만 본인은 도주에 성공하고 이학영만 현장에서 붙잡혀 본인의 몫까지 이학영이 옥살이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기사였던 [[경향신문]] [[1979년]] [[4월 27일]] 금요일 기사[[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42700329207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4-27&officeId=00032&pageNo=7&printNo=10328&publishType=00020|#]]에 따르면 과도가 아닌 20cm 정도의 등산용 칼로 당시 경비원이던 27살의 김 모 씨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 중태에 빠트린 후 달아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고 한다.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당시도 사회운동 중이라서 조카의 이름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그 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경기도]] [[군포시(선거구)|군포시]] 선거구에 출마해 [[새누리당]] [[유영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총선]]에서는 [[군포시(선거구)|군포시]]가 [[군포시 갑|갑]][[군포시 을|을]]로 분구되었을 때 [[군포시 을|을 지역구]]에 출마해 [[새누리당]] 금병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군포시 선거구가 분구 상한선인 28만명을 초과해 갑을 2개로 분구되었고 갑 지역구는 같은 당 소속의 [[더불어민주당/인재영입#s-2.9|인재 영입 8호]]로 영입된 [[김정우(1968)|김정우]] [[기획재정부]] 국고국 계약제도과장이 출마해서 당선되었는데, 원래는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하려다가 지도부는 당선시키기 위해서 갑 지역구로 전략공천을 결정하게 되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21대 총선]]에서는 [[군포시]]가 다시 합구됨에 따라 [[군포시 갑]]의 [[김정우(1968)|김정우]] 의원과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공천을 받았다. 이후 [[심규철]] [[미래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3선 고지에 오른다. 그리고 제21대 국회 전반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20대 대선]] 이후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무현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등, [[친노]], [[친문]]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20대 대선 경선 국면에서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면서 [[친명]]으로 합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