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효상 (문단 편집) === 친일 행적 논란 === 대구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 자기 제자들을 학도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려하기도 하는 등 친일 부역 혐의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효상이 교편을 잡았던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가 [[1921년]]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학교고, 그 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도 배출되었다는 것 등으로 쉴드를 쳐줄려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당시 교남학교는 5년제가 아니라 4년제라서 상급학교 지원이 불가능하여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5년제 학교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이효상이 기껏 찾아가서 모셔왔다는 사람이 친일파 서병조(1882~1952)였다. 이효상과 서병조는 대구 진골목에서 서로 옆집에 산 이웃사촌 지간이었다. 서병조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채보상운동]]으로 알려진 [[독립유공자]] [[서상돈]]의 차남이었다.] 대구 지방의 유지로서 1924년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를 여러 차례 지내고,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조직위원회에서 활동한 인간이다.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각종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35년 조선총독부가 "일한병합 이래 시정방침의 철저한 선전에 노력하여 내선융화를 조장한 인물"이라며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해 칭찬한 인물이다. 이 내용은 재경 대륜학교 동창회 인물/열전에 실린 이야기며, 거기에는 이효상이 "서병조 선생만이 교남을 구출할 분이라고 믿고 서병조 선생에게 교남을 맡아 달라고 끈질게게 설득하고 애절하게 호소"하였다고 나온다(...). 즉 [[1921년]] 교남학교가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건 맞지만 정작 5년제 대륜학교로 인가될 수 있었던 건 이효상이 친일파 서병조가 학교를 인수하도록 설득한 덕분이였으며, 대륜고등학교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이효상 개인의 당시 친일성향의 반박 근거가 되기는 희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