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흥실 (문단 편집) ===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대행 (2012) === [[파일:NISI20120711_0006649805_web.jpg]] 2011년 [[레바논 쇼크]]의 여파로 [[조광래]]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되면서 [[대한축구협회]]가 전북의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였는데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은 취임하는 자리에서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끝나는 2013년 6월까지만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고 이후로는 전북으로 돌아오겠다고 밝히면서 감독 대행직에 올랐다. 3월 3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홈 개막전이자 자신의 프로 감독 첫 데뷔전에서 성남을 상대로 3:2의 승리를 거두며 화려한 데뷔를 했다. 하지만 3월 7일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중국의 광저우에게 홈에서 5:1 대패를 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 원정에서도 또 5:1로 패배하고 말았고 이후 태국의 부리람과의 2연전에서 승리하고 광저우 원정에서 극적인 3:1 역전승을 거두며 반등하나 했지만 가시와와의 홈경기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전북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수모를 맛보고 말았다. K리그에서도 디펜딩 챔피언답지 않은 경기력으로 3월달 다섯 경기에서 2승 1무 2패라는 생각보다 저조한 성적을 내며 부진에 빠졌다. 잇따른 5:1 패배로 '''오대일''' 감독, '''흥'''겹게 '''실'''점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욕을 많이 먹었으나 4월 27일 광주와의 경기에서 광주를 5:2로 격파하고 이후 6월 28일까지 8연승을 달리며 3주 연속 1위를 수성한다. 이 8연승은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 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기록이며 전북 역사상 최다연승 기록이다. 7월 11일, 서울전에서 K리그 통산 최다 연승 기록과 타이기록인 9연승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0:0 무승부에 그치며 연승행진을 멈췄다. 그러나 시즌 내내 이어진 수비진의 줄부상으로 미드필더인 [[김정우(축구인)|김정우]]나 스트라이커인 [[정성훈(동명이인)|정성훈]]이 수비를 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상승세를 이어나가지 못하며 2012년 시즌을 2위로 마쳤다.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이 갑자기 팀을 떠난 상태에서 1년동안 선수들의 부상 악재에도 불구하고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으나, 전북 팀 역사상 최초로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탈락 등 팬들의 높아진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으며 [[2012년]] [[12월 12일]]에 자진 사퇴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이후 [[브라질]] 출신의 파비우 레푼지스 피지컬 코치가 이흥실의 후임으로 전북의 감독 대행을 맡았고,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의 복귀가 잠시 지연되자 새로 수석코치가 된 [[신홍기]]가 [[최강희(축구인)|최강희]] 감독이 복귀하기 전에 1경기를 감독 대행으로 치렀다. 전북에서 이흥실은 최강희 감독이 사용하던 닥공전술을 구사하였지만 이흥실 감독의 닥공축구는 최강희 감독의 닥공축구와는 다르게 굉장히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중요시했으며, 수비시 최강희 감독은 전진함으로서 전방압박을 요구했다면, 이흥실 감독은 공격수들이 수비진영의 대형에 맞추어 자리하는 패턴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런 이흥실의 닥공축구는 기존의 전북 축구의 색깔하고 다소 달랐다는 점과 더불어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기존의 닥공축구와는 다르게 허점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축구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