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평대군 (문단 편집) == 여담 == * [[도둑]]맞은 적이 있다. 이광필(李光弼)이란 사람이 그의 집에서 [[금]][[병풍]]과 [[벼루]][[집]], 그리고 [[동물]]의 털로 짠 붉은색 담요 등을 훔치다 잡혔다. [[왕자]]의 집을 도둑질했으니 당연히 중죄였다. 이에 이광필이 [[물귀신]] 작전을 써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복형제|이복동생]] 등 여러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금방 들켰다. 그래서 이광필은 [[절도죄]]에 [[무고죄]]까지 더해져 [[처형]]당했다.(《[[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2월 21일 갑오 2번째 기사 : 이광필을 무고죄로 처형하다.) * [[소용 조씨]]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효명옹주]]와 껄끄러운 일화가 있다. 효명옹주는 [[인조]]의 유일한 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라 성격이 이기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려 왕실 가족이 다같이 참석했을 때, 효명옹주는 자신의 이복오빠인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오씨는 "작급으로는 내가 옹주보다 아래이나[* 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다.] 적통으로서는 내가 옹주보다 먼저이다."라고 주장했고, 효명옹주는 "[[인조|부왕(인조)]]이 계시니 내가 먼저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효명옹주의 나이가 11세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을 보면 오만방자한 성격이 다 드러난다. 사실 양쪽 말 다 맞다. 인조가 살았든 죽었든 옹주의 품계는 무계이니 정1품인 부부인보다 엄연히 위다. 하지만 오씨는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 오빠이자 적통 대군인 인평대군의 부부인이자 손위 올케였다. 둘의 말이 모두 맞았기에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일이 커지자 인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 인조는 자기 딸의 편을 들어 [[효명옹주]]가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 이때 다툼의 상대가 복천대부인이 아니라 [[민회빈 강씨]]였다는 판본도 있는데, 신빙성은 매우 낮다. 대부인은 품계상 옹주보다 아래니 애매하지만, 세자빈은 어떻게 쉴드가 안 된다. 세자빈은 차기 국모로서 무품 중에서도 왕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설령 옹주가 아니라 공주고 세자보다 누나여도 세자빈에게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 효명옹주가 아무리 오만했어도 세자빈에게 덤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효명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 [[추안급국안]]에 기록되길 79세 여자 거사 설명(雪明)의 진술에서 "조 귀인(소용 조씨가 귀인이었던 때다)이 자신에게 베개를 하나 줬는데, 보니 꽤나 좋은 베개라 이런 물건은 자신한테 필요없다고 하니, 조 귀인이 인평대군 방에서 보낸 베개라고 하면서 직접 베개를 뜯어서 검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노루의 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했다.] 인평대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형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의 가족들을 음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인 [[소용 조씨]]의 딸인데다, 자신의 부인을 대놓고 무시한 행적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걸려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동복 형제들간의 우애는 좋았다. [[인조]]는 이복 형제자매들간의 사이를 염려했는지 승하하기 전에 [[효종(조선)|효종]]에게 [[효명옹주]]와 그녀의 [[숭선군|남동]][[낙선군|생들]]을 잘 보살펴주라 당부했다. [[소용 조씨]]는 효종 즉위 직후 '효종 저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지만 [[효명옹주]]와 그녀의 동생들은 효종의 보살핌을 받아 국문도 면하게 해주고, 귀양지도 지속적으로 편한 곳으로 옮겨주다가 종래에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주었다. *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헨드릭 하멜]] 및 그 일행들과 인연이 있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해서 [[제주도|제주]]에 머물다 [[한성부|한양]]으로 압송당해 지내던 중,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을 보고 하멜의 동료 2명이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험분자로 여겨 죽이려고 했다. 심지어 이미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 역시 가망없을 거라고 했을 정도. 정확히는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 것"이라 말했다. 즉,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절망하던 하멜 일행은 마침 [[지나가던 ○○○|지나가던]] 인평대군을 보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딱하게 여긴 인평대군이 [[효종(조선)|효종]]에게 간청해 [[강진 전라병영성|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줬다. 이 정도면 인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은인|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썼다. * 하마터면 역모로 몰려 큰일날 뻔했다. [[1656년]](효종 7년)에 당시 승지 유도삼이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의 연회에 참석해서 행패부리다가 뒤늦게 대군이 있음을 알고는 사과했다. >柳承旨最後扶疏醉入來蹲座則座客謂曰'''大君自家'''在此矣柳承旨顚倒起拜稱小臣不察云座 >유승지(승지 유도삼)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좌객이 '''"대군 자가께서(인평대군)'''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승지가 깜짝 놀라 일어나 절을 하며 '소신의 불찰입니다'라고 말했다. >----- > - 추국일기 3권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no=kh2_je_a_vsu_23455_003&pageid=29b|#]] 그런데 문제는 사과하던 중에 그만 칭신, 즉 인평대군에게 신하를 칭한 일이 일어난 것. 원래 칭신은 왕에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거 까딱 잘못하면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거리다. 아니나 다를까 [[천안시|천안]]군수 서변이 이 사실을 전 군수 홍주일의 아들 홍만시에게 전해 듣고, 오정일 · [[허적]]· [[원두표]] 등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효종(조선)|효종]]은 이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두표]]는 [[서인]]인데 오정일, 허적은 대표적인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 일단 고변에 연루된 자들을 근신시키고는, 서변 및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국문했다. 그 결과 서변이 뜬소문을 듣고 공을 세울 욕심에 무고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서변과 홍만시 등은 혹독한 국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배]]를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대사간 유철은 유도삼이 인평대군에게 신하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나 사사롭게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며 유도삼의 파면을 청했다. 그러자 효종은 하나뿐인 친동생 인평대군을 없애려는 나쁜 짓이라며 분노했고 오히려 유철이 서변을 사주했다며, 그를 국문하고 절도에 귀양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서변의 옥사]] 문서 참조. * 《풍암집화(楓巖輯話)》, 《이순록(二旬錄)》, 《[[성호사설]](星湖僿說)》 등 조선 후기에 나온 책들에 인평대군가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책마다 조금씩 버전이 다른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평안도]] [[성천군]]에 재색을 겸비한 득옥(得玉)이란 [[기녀]]가 있었다. 인평대군이 성천에 갔을 때 득옥을 보고 연모하여 자신의 집에 데려왔다. 인평대군은 술자리마다 득옥을 옆에 두었는데,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창이 보고서는 몰래 득옥과 정을 통했다. 이를 알게 된 오정창의 아내 정씨 부인은 득옥을 없앨 계획을 꾸몄다. 바로 여종을 시켜 득옥의 방에 인평대군이 아끼던 귀중품을 숨기고 이를 득옥이 훔쳤다고 모함한 것. 시기도 하필이면 인평대군이 집을 비운 때였다. 이에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는 무고함을 알면서도 노비들을 시켜 득옥을 매질해 죽인 다음 산에다 매장했다. >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득옥이 살아돌아왔다! 그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씨 부인의 방과 먹을 약에 피가 낭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평대군은 병석에 누웠다. 득옥이 인평대군 베개 옆에 앉아있는 것을 본 집안 사람들은 놀라 무서워했고, 얼마 못가 인평대군은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득옥은 [[귀신]]이었다. 즉, 살아온 게 아니라 복수하려고 귀신이 되어 돌아온 것. 인평대군 사후 득옥은 오씨 부인에게 “심정이 어떻습니까? 저승에서 죄 없이 죽은 저를 가엾이 여겨, 대군을 모시며 팔각정에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부인은 저를 또 부러워하겠군요”라면서 조롱했고, 이후 가솔들이 늦은 밤에 (인평대군 저택의) 후원을 가면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오씨 부인은 신경이 쇠약해져 얼마 못가 남편을 따라갔다. 이후로도 득옥은 온갖 변괴를 일으켜 그 일족을 다 멸하고 나서야 저주 행위를 멈췄다.[[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cp0415&index_id=cp04150063&content_id=cp041500630001&print=Y|#]] 물론 실화는 아니다. 다만, 인평대군과 그 가족들의 이른 죽음이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저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하는 추측이 있다. 이 이야기는 2020년 7월 7일 [[채널 A]] 역사재현 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 다루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DM3YyKsB0M)]}}} || || {{{#gold '''〈천일야사〉에 나온 득옥 에피소드'''}}} || * 1656년(효종 7년)에 [[청나라]] [[베이징|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남긴 기행문 《연도기행(燕途紀行)》에 괴물 강길에 대해 적어두었다. 강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강길]] 문서 참조. * 가족과 후손 단락에서 언급하겠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과 [[흥선대원군]]의 혈연 상 실제 조상이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을 내릴 때, 몇몇 [[유림]]들이 이에 반발하여 인평대군을 모신 [[서원]]을 짓는 꼼수를 부렸다. 설마 자신의 조상을 모신 곳을 건드리겠느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흥선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없애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