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평대군 (문단 편집) === 후손 === 오단(呉端)의 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해 슬하에 6남 4녀를 얻었다. 2남, 4남과 3녀, 4녀는 요절했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총 4남 2녀이다. 큰아들이 [[복녕군|복녕군 이욱/유(福寧君 李栯)]][*A], 3남이 [[복창군|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그리고 5남이 [[복선군|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이며 6남이 [[복평군|복평군 이연(福平君 李㮒)]]이다. 초명은 '棩' 인데 사촌 형 현종의 이름 역시 '棩' 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다. [[복평군]]은 일찍 죽은 [[인조]]의 4남이자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출계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고종 대에 가서야''' [[용성대군]]의 봉사손을 정하면서 사후 입적 된 것일 뿐, 생존 당시와 사후 200여 년 간은 법적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다. 큰딸은 향주 이금온(李金溫)으로 [[풍양 조씨|조기수]](趙祺壽)와 혼인했고 둘째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주로 [[해주 정씨|정중만]](鄭重萬)과 결혼했다. 복천부부인 오씨는 인평대군과 동갑으로 임신 중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이를 못낳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봉군되었고 결혼까지 한 어엿한 성인이었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아직 어린이들이었기에 이를 딱하게 여긴 [[현종(조선)|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그러면서 이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조선)|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깍듯이 잘 대접하였다. [[현종(조선)|현종]]과 [[숙종(조선)|숙종]] 모두 외아들이었기에 [[현종(조선)|현종]]에게 가장 가까운 부계친척은 사촌들이었고 [[숙종(조선)|숙종]]에게는 오촌이 가장 가까웠다. [[숙종(조선)|숙종]] 시기에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일컬어 봉호에 다 '복(福)'이 들어간다고 해서 '삼복(三福)' --[[삼복|이게 아니다]]--이라 불렀다. 여기서 '복(福)'자는 인평대군 부인 복천부부인의 본관지인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유래했다. 복천부부인의 작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술했듯 인평대군이 서인들에게 모함을 받은 일 때문인지 이들은 훗날 [[남인]] 편에 섰고, 오촌 조카 [[숙종(조선)|숙종]]이 즉위한 후 [[경신환국]]에서 [[삼복의 변]]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숙청 작업에 탈탈 털렸다. 자세한 것은 '''[[경신환국#s-3.3|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장남 [[복녕군]]은 이미 현종 시절인 1670년(현종 11년)에 35세로 단명하여 숙청에 엮이진 않았다. 주목할 것은 장남 [[복녕군]]의 가계이다.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실제 혈맥이기 때문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혈통상으로 [[복녕군]]의 7대손이다. 여기에 [[양자(가족)|양자]] 입적을 통해 가계가 더 복잡해지게 된다. [[복녕군]]의 5대손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이 족보 상으로 13촌 아저씨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은신군]]은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왕위계승권과는 먼 방계혈족이지만, [[은신군]]은 원래 [[사도세자]]의 서차남으로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자연스레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다. 그래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가까운 왕족 자격으로 왕위 계승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단, 양자 관계로 인해 법적으로는 [[효종(조선)|효종]]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8대조이다.] 한편 [[덕흥대원군]]의 후손들끼리 서로 입양하는 횟수가 잦는 등 가까이 지내자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려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은 11대손(12세손) 이하로 전부 [[항렬|항렬자]]를 같게 했는데, 이 때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로 통일시켰다.[* 그 전까지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어도 [[선조(조선)|선조]] 후손이 아닌 [[덕흥대원군]]파와, [[선조(조선)|선조]], [[인조]]의 왕자군에서 갈라진 파마다 항렬이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덕흥대원군]] 11대손을 기준으로 할 때, [[능원대군]]파에서는 '세O(世)', [[경창군]]파에서는 '신(愼)O' 등으로 썼다. 인평대군파의 항렬은 인평대군의 아들 대부터 '木', '火', '土' 를 각각 외자의 부수로 사용했고 '土' 변 항렬 이후 '진(鎭)O', '병(秉)O', 'O중(重)'으로 이어나갔다. 그 다음이 'O응(應)'인데 'O응(應)' 부터는 모든 [[덕흥대원군]] 후손들의 항렬이 같다. 이후 '재(載)O', 'O용(鎔)', '해(海)O',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 'O희(熙)' 순으로 나간다.] [[인평대군|인평대군가]]의 8대 종손(宗孫)이 [[이재극]]인데 대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조선 왕실에서 [[효종(조선)|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이 끝끝내 단절된 것을 따라하듯, 인평대군파 종가 역시 후대로 올수록 자손이 귀해졌는데, [[이재극]]의 아들이자 9대 종손인 이인용의 막장드라마급 방탕한 생활로 가문은 몰락했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5남인 [[이수길]]이 양자로서 10대 종손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평대군파 종가는 혈맥 상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손이다. [[용성대군]]의 양자가 된 6남 [[복평군]]의 9대 종손이자 장남 완계군 이찬의 8대손으로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며 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언론인인 [[이해조]]가 있다. [[이해조]]의 손녀는 기독교 여성운동과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대모 [[이우정(1923)|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현재 한국의 맞춤양복점 중 가장 오래된 종로양복점의 창업주 이두용은 인평대군의 9대손이다. 1916년 개업 이래 대를 이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운영 중이다. 현재 사장인 이경주는 이두용의 손자이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4161656095509?did=DA&dtype=&dtypecode=&prnewsid=|#]]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