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육군사관학교 (문단 편집) == [[조선인 일본군]] ==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의 창군 멤버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나라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기 때문.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 초대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2대/4대 [[채병덕]](49기), 3대 [[신태영]](26기), 5대 [[정일권]](55기 상당[* [[만주국육군군관학교]]예과 2년 교육후 성적 우수자에 대한 특례로 일본육사 본과로 유학갔다.]), 6대/8대 [[이종찬]](49기), 9대 [[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즉 7대/10대 육참총장인 [[백선엽]]만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육사 출신. 계급으로 보면 이응준, [[유승렬]],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신태영은 중좌, 채병덕과 이종찬은 소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으로 가보면 초대 이형근(56기), 2대 정일권(55기 상당), 3대 유재흥(55기), 4대 백선엽 순서이다. 조선말기 관비 유학생으로 약간명씩 유학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육군무관학교]]가 [[1909년]] 폐지되며 일본중앙유년학교-일본육사 강제 편입된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안병범 대좌, 신태영 중좌, 박승훈 소좌(만주군 중교),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등 13명은 일본육사 26기[*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지청천]], [[김경천]] 장군 포함],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위 등 20명[*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이종혁 포함]이 일본육사 27기로 마지막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 왕족이나 이형석(45기)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한동안 일본 육사 입학의 길이 막혀 있다가 조선무관학교의 아들 세대인 49기([[1933년]])에서 채병덕, 이종찬 등 조선인 2명이 입교 한다.[* 조선인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없어서 육사 입시에 불리했다. 채병덕, 이종찬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 출신. 이후 [[1934년]] 9월부터 고보에도 일본군 장교들이 파견되어 교련교육이 시작된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선에 살던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매 기수별로 약간명씩 조선인들이 입교 한다.(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은 별도) 몇 안 되는 일본 육사 출신끼리는 매우 친했는데 유승렬(26기) 대좌의 아들이 [[유재흥]](55기) 대위, [[신태영]](26기) 중좌의 아들이 [[신응균]] 소좌(53기), 김준원 대위의 아들이 [[김정렬(1917)]](54기), 안병범(26기) 중좌의 아들이 안광수(58기), [[김석원]](27기) 대좌의 아들이 김영수(57기)였고, 이응준(26기) 대좌의 사위가 [[이형근]](56기), 백홍석(26기) 중좌의 사위가 채병덕(49기)으로 서로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이응준 대좌의 장인은 일본육사 15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이다. 즉 이들은 가족 같은 사이도 아니고 그냥 가족이었다. 또한 [[이하영]] 자작의 아들이 [[이종찬]](49기) 대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입교가 허락된 49기 이후의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상이 검증된 [[친일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학창시절 일본인 학교를 다닐 때, 조선인이 자신 빼곤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경흥군]]에는 일본인이 다니던 심상소학교 1곳, 조선인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1곳 있었다. 이 중에서 유승렬 대좌의 아들 [[유재흥]]은 심상소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육사에 갈 자격이 있었고, 반면에 동급생격이었던 경흥 보통학교에 다니던 정일권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가야만 했다.[* 한동네이긴 하지만 학교가 달라 서로 몰랐다. 이후 정일권은 성적우수로 일본육사로 유학오게 되어 유재흥과 같은 55기가 된다. 다만 교육을 따로 받아 서로 모르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일본군에서 장군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육군대학 졸업이 필수인데 조선인들은 여기에 갈 수 없어 대좌가 진급 한계선이라 '대좌정지'라는 말까지 존재 했었다. 다만 [[홍사익]]만은 시범 케이스로 유일하게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승진이 가능했다. 다만 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조선 왕족들은 예외이다. 막판에 조선인 육대 제한 규정이 풀려서 [[유재흥]] 대위가 [[1945년]] 5월에 시험을 보았으나, 일본패망.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엔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정렬(1917)|김정렬]]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며 [[장지량]]도 육항사 출신이다. [[김창규(군인)|김창규]]는 일본 육사 출신이다. 8대 [[박원석(군인)|박원석]] 또한 육항사 출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에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이뤄졌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설립 주체가 일본군과 무관했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중화민국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과 [[독일]] 상선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등 창설 멤버 대부분이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었다.], 또 [[일본 해군]] 역시 조선인에 대한 문호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 [[1943년]]에야 [[수병]]에 한해 지원을 받았고, 그나마 함정에는 배치하지 않고 육전대나 설영대(시설대), 항공대, 육상 경비대 등에만 배치했다. 해군병학교는 패전시까지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으며, 소수가 [[일본인]]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입학 및 임관한 바는 있다.] 한국 해군에는 일본군 출신 참모총장이 없다. 11대 [[송요찬]]은 [[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다. 12대 [[최영희(군인)|최영희]]는 일본 센슈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학병으로 소위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장도영]]은 토요 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 [[김종오]]도 일본주오대 재학 중에 육군 소위로 끌려갔다. [[민기식]]은 [[만주국]] [[건국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16대 참모총장인 [[김용배]]도 일본 육군 소위 출신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계원]]도 일본 육군 소위로 전선에 갔다. [[1969년]]에야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서종철]]이 19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자세한 사항은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9C%A1%EA%B5%B0%EC%82%AC%EA%B4%80%ED%95%99%EA%B5%90#.ED.95.9C.EA.B5.AD.EC.9D.B8_.EC.A1.B8.EC.97.85.EC.83.9D_.EB.AA.85.EB.8B.A8|위키백과]]를 볼 것. 일반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임에도 [[일본군]]을 거부하고 [[독립군(한국)|독립군]]으로 가거나 일본군 내에서 [[간첩|공작활동]]을 하여 독립군을 이롭게 한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전원 [[조선시대]] 유학가거나 한일병탄으로 강제 유학가게 된 케이스. 대표적인 예가 [[노백린]](11기)과 [[지청천]](26기), [[김경천]](23기) 등이 있다. 노백린은 경술국치 전에 졸업해 [[대한제국군]]에 소속되었다가 군대 해산 후 망명, 지청천은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소속했다가 [[1919년]]에 만주로 망명, 김경천은 [[경술국치]] 전에 입학해 [[1911년]] 졸업 후 일본 육군 소위 임관을 거부했으나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군에 들어가 군사 기밀을 빼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위로 복무 중 [[1919년]]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조선인 입교가 다시 허가된 채병덕, 이종찬의 49기 이후로는 이렇게 독립군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사상검증이 끝난 [[조선귀족]] 또는 [[조선인 일본군]]들의 자제들로 일본학교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자라 조선말조차 잘 못하였다. 여담으로 일본육사에서는 [[일요일]] 주간에 휴식을 주었다. 동경 출신들의 경우 집에 가서 쉬지만, 지방 생도들은 각현에서 출자한 '일요 하숙'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요 하숙은 현별로 사관 학교 주변에 방 1~2개를 얻은 것으로 푹 자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목마른자의 샘물 같은 곳이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49기부터 채병덕, 이종찬 등은 이런 일요 하숙이 없어 곤란해 하였는데, 선배인 이형석(45기)의 안내로 히로시마 현인회인 초수회에 몇 차례 간 적은 있었으나 [[1933년]] 6월에 이형석이 졸업하면서부터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일본군 교육총감부 중좌였던 영친왕 이은이 육사의 조선인 생도들이 일요하숙 문제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부 무관 김인욱 소좌를 보내 도쿄의 요쓰야에 이들을 위한 일요하숙(고토 운송점 2층)을 마련해주었다. 이때 채병덕은 이종찬과 함께 친목모임을 결성했는데, 신라의 옛 이름을 따 <계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조선인이라고 해도 한 기수가 2천여 명에 달해 선후배는 물론 동기라도 병과가 다르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리 수밖에 안 되던 육사 재학 중인 조선인들은 모두 일요일마다 계림회에 모여 친목을 다졌고, 이 때문에 일본 육사 출신자들은 돈독한 유대관계는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친왕 이은은 1년에 한번 이들을 불러 중국집에 불러 포식시켜 주고, 참석 할 수 없을 때는 시종 무관(이형석)을 보냈다. 그리고 육사 생도들은 정월마다 이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의 집에 들러 세배를 하였다. 이때 이은의 집은 너무도 웅장해서(일제패망 후 프린스 호텔로 개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족 중 제일 부자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다만 만주군관학교에서 유학온 [[정일권]], [[박정희]] 등은 조선인 생도들과는 전혀 교제가 없었고, 계림회에 왔다는 기록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