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부다처제 (문단 편집) === 여성들의 입장 === 우선 과거의 시점에선 '''대부분의 국가의 여성들이 부정적이였다'''. [[여초]] 현상이 극심하다는 [[체첸]]에서조차 일부다처제 도입은 결국 여성들의 극렬한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정도.[* 물론 고위층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 당장 수장인 [[람잔 카디로프]]도 아내가 셋이고, 아내와 장성한 자식이 있던 57세의 경찰청장이 17세 소녀를 협박해 납치혼을 했음에도 조용히 무마되었다.] [[고려]]에서도 [[박유]]가 인구 격감과 여초 현상을 이유로 일부일처 그만두자고 했다가 오만 욕을 다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무슬림]] 여성들도 일부다처제에 긍정적이지는 않은데, [[한국인]] 대학생들이 전세계 대학을 찾아가서 자매결연하고 현지 대학생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걸 쓴 <캠퍼스 로드>라는 책에 나온 일화에 따르면 이러하다. [[이란]] 테헤란 대학교에서 남녀 학생들과 대화하다가 일부다처제 이야기가 나오자 남학생들은 "돈만 있다면 꿈꿀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 이란 여학생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이런 말을 한 남학생에게 화를 내면서 욕설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성별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첩이나 여러명의 남편 중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일부다처제를 모든 여자들이 무조건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서의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경우는 긍정적이다. 이런 이유는 낮은 신분인 여성일 경우 [[첩]]이라도 '''[[승강혼]]'''이기 때문이다. 단지 부정적이라고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정도 많다. 일례로 [[유럽 난민 사태]] 때는 [[요르단인]]의 아내가 되면 그 인척들까지 [[요르단]] 국적을 주기에, 몸만 챙겨 피난온 [[난민]] 여성들이 요르단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일부다처의 형태로라도 요르단인 남성과의 결혼을 희망한 일이 있다. 현지인에게 일부다처제를 하자면 여러 사항들을 깐깐하게 점검해야 하지만, 돈도 시간도 법적 지위도 안전도 부족한 난민들은 지참금이고 뭐고 일단 딸을 그냥 팔아넘기려고 한 것이다. 난민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왜 딸을 버리냐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딸들이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여서 수십만명에 이르는 [[시리아]] 및 [[이라크]] 난민들이 요르단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지리적인 요건이라든지 환경에 따라 여성들이 오히려 권장하기도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이자 만화가인 [[프랑스인]] 에마뉘엘 기베르와 프레데릭 르메르시에가 [[1980년대]] [[소련]]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 산악을 의료차 들렀을 때를 그린 [[http://en.wikipedia.org/wiki/The_Photographer_(comics)|평화의 사진가]](한국에서는 [[세미콜론(민음사)|세미콜론]]을 통해 정발되었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프랑스]] 여의사가 험한 산가를 어렵게 가서 거기 사람들을 의료봉사하면서 거기 사는 비슷한 나이를 가진 여인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3년 뒤에 그 곳에 다시 가보니 그녀에게 낯선 젊은 여자가 곁에 있기에 "친척인가요?"라고 물어보니 "내 남편의 둘째 아내에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거 아닌가? 놀란 프랑스 여성이 "그리도 금실좋던 부부였는데 왜 둘째 아내를 맞이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 첫째 아내가 말하길, "내가 둘째 아내를 빨리 맞이하라고 남편에게 말했죠. 그러자 남편은 '뭔 헛소리야? 난 그럴 마음도 없고 당신이면 충분해. 뭐하러?'라며 거부했죠. 그 마음은 기뻤지만 그래도 내가 1년 넘게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편이 백기들고 2번째 아내를 맞이했어요."라며 웃으며 자랑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산골 마을이라 여성이 좀처럼 없고 그나마 있는 다른 여성들도 나이가 훨씬 많아서, 이 첫째 아내가 외로움을 못 견뎌서 친구 겸 식구로 받아들이고자 남편에게 1년이나 설득했던 거였다. 그래서, 프랑스 여성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 여성은 "여보, 당신을 위해서 둘째 아내를 맞이하라는 게 아니에요, 바로 저를 위해서 맞이하라는 거에요. 예. 부탁이에요. 제발."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 프랑스 여성은 동료인 이 책 지은이들에게 '프랑스에서라면 별 미친 소리 같지만 여기에선 이런 게 정상인 현실이지. 뭐, 우리 프랑스도 이런 역사와 지리를 가졌더라면 똑같아졌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이 남편은 그 지역에서 꽤 [[부자]]였기에 양과 말이 100 마리가 넘고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척박한 곳에서 가축을 몇십 마리 가지는 것도 엄청난데 이 정도의 부자였던 터라, 아내도 저렇게 새 아내를 맞이하라고 할 여유가 있었다. [[모리 카오루]]의 [[신부 이야기]]에도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여성은 외간 사람과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풍습 탓에 다른 사람과 교류도 못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정말 너무 외롭게 지내던 여인 [[아니스(신부 이야기)|아니스]]가 목욕탕에서 만나 친해진 또래인 [[시린(신부 이야기)|시린]]이 남편과 사별한 뒤 아이와 늙은 시부모까지 돌봐야 하는데 벌이도 없어 어려움에 처하자 [[아니스의 남편|자신의 남편]]에게 부탁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슬람이랑 상관도 없이 [[파라과이]]도 꽤 오랫동안 일부다처제를 한 바 있다. [[1870년]] [[삼국동맹전쟁]]에서 대패하면서 파라과이 남자들이 거의 다 죽거나 상대 국가로 끌려가 노예 신세가 되면서 극소수밖에 안 남은 형국[* 전쟁이 6년이나 길게 이어지다보니 많은 남자들이 죽자 파라과이는 남자는 10살만 넘어도 군인이라고 아이들이나 청소년까지 징병했기 때문이다. 이들 대다수도 죽거나 패잔병으로 잡혀 노예로 끌려갔다. 게다가 전쟁 상대국도 남미에서는 넘버원급인 국가들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연합군에 거기에 우루과이까지 낀 3국인지라 이 세 나라 중에서 파라과이보다 약한 나라가 없다는 게 문제다.]지라 이 당시 파라과이 여성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전국민의 92% 상당이 여자이니 결혼을 하려면 일부다처제로 가든가 아니면 평생 미혼으로 살다 죽든가 해야 했다. 파라과이는 이때, 너무나도 다급해서 그동안 사람으로 안 보던 밀림 속 [[원주민]] 남자들에게 가서 이제 도시로 와서 파라과이인으로 받아둘테니 다 같이 살자고 요청할 정도였다. 심지어, 돈벌려고 와 일하던 [[인도인]] [[외노자]]들에게까지 돌아가지 말고 남아서 파라과이인으로 귀화해 살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들에게도 당연히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고 유혹할 판국[* 파라과이와 사정이 다르고 일부다처제랑 관계없으나. 근대 포르투갈이 인구가 크게 줄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외노자나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까지 해방시켜서 포르투갈 민간인으로 살게하여 가정을 이뤄 인구를 늘리게 했던 일.]이었다. 파라과이 여자들은 이게 싫으면 이웃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가서 그쪽 남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이때, 파라과이는 이 두 나라와 치열하게 싸워 패한 전쟁 패전국이다. 당연히 파라과이 여자들에 대해 첩실도 아닌 일개 창녀 수준이나 성노리개 수준으로 인식될 터에 이웃 나라들에 가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었다. 자국은 전국의 남성들이 다 죽거나 끌려가 없어진 상황인지라 금수저가 존재해도 여기도 극소수 중의 극소수이니 이런 금수저들에게 선택받는 것도 보통 여성은 불가능했다. 이러니 대다수 여성들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따위 없었다.[* 다만 이 와중에도 흑인이 많은 브라질군들에게 강간당해 태어난 흑인 아이들은 죽여버리기도 했다. 인도인이라든지 원주민들은 흑인이 아니라서 아기 피부색을 보면 구별이 가능했지만. 물론, 파라과이도 극소수 흑인도 있었기에 적어도 이들 신분 파악이 가능한 아버지가 확실한 일부 극소수 아이들은 살수 있기는 했지만 이 일은 파라과이 역사에서 더러운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래서 파라과이는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제를 1950년까지 시행해야만 했다. 이런 극한상황인데도 일부다처제가 싫다면 그냥 평생 결혼을 못하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시대상으로도 여성이 혼자 생활하기 무척 힘든 시대이고 파라과이는 전쟁으로 박살난 상황에 여자들이 일할 곳도 정말 없었다. 부숴진 집 철거나 복구공사 위해서라도 남자가 많이 필요한 와중이라 여자들이 독신으로 살자면 이런 힘든 일을 스스로 해야했다. 게다가 여자들이 군대도 가야하고 총칼 잡고 또 모를 이웃 나라들의 침략도 대비해야 하고....이러다보니, 독신 여성들도 결코 살기 좋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파라과이 정부는 아이를 하나라도 더 낳고 인구를 늘려야하는데 독신 고집하면 여자들은 군대도 가고 힘든 일을 맡아야 한다라고 강요했는데 이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정부로서도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적어도 군대로 보내지 말거나 특혜라도 줄 수 밖에. 이러니, 독신 [[여자]]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군대 가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주변 나라들 상황에 불안해하고[* 아이러니 하게도 3국 동맹 당사자나 그와 주변국들은 파라과이를 내버려뒀다. [[남자]] 다 죽고 [[여자]]만 남은 동네 쳐들어가봐야 얻을것도 없고 오히려 "[[여자]] 상대로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하니 말이다.]힘든 노동도 같이 해야하기에 도중에 포기하고 첩실이라도 좋으니 결혼하겠다고 하던 여성들도 많았다...게다가 이 당시 파라과이에선 여자를 대상으로 벌인 강간조차도 넘어가는 일도 많았는데 피해 여성 상당수가 독신 여성이었다. 21세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부다처제가 허용될 경우 능력있는 남자 한 명에게 여러 명의 여자들이 몰빵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이재용]]이나 [[정의선]]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인의 본처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첩으로 들어가면 매월 생활비 명목으로 몇 천만 원씩 들어오기 때문에 평생을 일 같은 거 안 해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반면 월수입이 부실한 남자의 본처가 되면 [[맞벌이|같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평생 뼛골 터지게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21세기 이후에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면 많은 여성들의 [[후궁]]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도 있다.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온 사연인데 본처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스스로 자신의 친구를 남편에게 첩으로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에게서 남편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아무튼 닥치고 일부다처제는 죄악이라느니 미개하다느니 비난할 수는 없다. 위에 서술하듯이 많은 사정과 조건들 때문에 마지못해 살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걸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셈이다. 여자들의 입장에서도 [[승강혼]], [[전쟁]]으로 인한 [[성비]] 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오히려 여자가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깊이 있는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심히 비난하는 것은 쓸데없는 [[오지랖]]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