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해군 (문단 편집) == 생애 == [[선조(조선)|선조]]와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5살 어린 나이에 친모인 공빈 김씨가 사망하면서 적모 [[의인왕후]] 손에서 자랐으며, 동복동생인 광해군과는 달리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는 탓인지 의인왕후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복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막장이자 인간 말종으로 악명이 높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자]] 시절부터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인간쓰레기 왕자'''이다. 개차반 [[인성]]을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중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정확히는 순화군은 [[강원도]]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지만 강원도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가면서 함경도로 피해 임해군과 합류했다.]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는데 원래의 임무는 하지 않고 순화군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한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닌 사건이다.[* 함경도는 [[세조(조선)|세조]] 이후로 조선 조정에서 천대받은 북방 지역 중 하나이자 거의 방치하던 지역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기고 말았다. 즉, 왕자들을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할 정도로 빡쳤다는 말.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을 이해하고 막장 왕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 다만, 함경도에서도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나지만 임해군은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성격]]이 포로 생활 동안 겪은 일 때문인지 더욱 막장이 되어버려서[*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던 가토 기요마사 측의 기록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포로로 잡은 조선 왕자들을 잘 대접했다는 것. 다만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잘 대접받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굴욕]]을 느껴서 성격이 망가졌을 수는 있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장남]]인 임해군이 있는데 왜 [[차남]]인 광해군이 즉위했냐'고 딴지를 걸자 '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미쳐버렸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차마 '타고난 미친 놈이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핑계로 둘러댄 명분일 공산도 있다.][* 사실 왜군 입장에서야 적국의 왕자라면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으니 잘 대해주는게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를 붙잡아 왜군에게 넘긴 백성들이다. 온갖 갑질과 횡포를 당하다가 이판사판식으로 왕자를 적군에게 넘기는, 대놓고 반란을 한 셈인데 당연히 뒷일을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나라가 이대로 희망이 없다고 여기거나 저질로 놓고 도망칠 작정으로 한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원수같은 '왕자놈'을 과연 곱게 대했을까? 백성들에게 대놓고 갑질할 정도로 포악한 임해군 입장에선 백성들이 '감히' 자신을 붙잡아 적에게 넘긴 행위 자체가 엄청난 굴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깽판]]만 치고 다녔다. 이렇게 단단히 미쳤음에도 그래도 왕자라고 [[정문부]]가 난리통 속에서 그를 구했으나, 정문부도 [[전쟁]] 중에 [[반란]]을 도모한 국경인을 척살하기 위해서였지 임해군을 위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일단 임해군은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폭행]], [[강도죄|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당시 공물은 조정으로 가는 중요한 물품인터라 멋대로 강탈한 것 자체가 당시에도 큰 범죄였다.],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 영의정 [[유전]]의 아들로 한음 [[이덕형]]과 외종지간인데 형제보다도 더 친해서 이덕형이 사건 당시 특히 분개했다. 다만 유희서도 당시에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등 평판이 좋지 못했다.]를 살해[* 도승지는 현재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요 [[신하]]로서 왕의 최측근이자 심복에 속한다. [[승정원]]의 승지 6명은 서로 품계는 같지만 도승지를 가장 높게 쳤다.]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임해군의 부하인 김덕윤이 지시를 받고 유희서의 살해에 가담해서 체포당했는데, 감옥에서 의문사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여 범인으로 임해군이 지목받기도 했다. 이때 한음 이덕형의 [[상소]]를 받은 선조도 임해군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조는 임해군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며, 임해군을 질책하기만 하고는 처벌은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또한 임해군을 수사한 포도대장을 파면하여 징역을 살게 했으며, 임해군을 고발한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게도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형에 처했다.[* 이것도 처음엔 괘씸죄로 사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유희서의 어머니가 손자만은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해서 특별히 선처해준 것이다. 한 마디로 피해자들과 수사관을 처벌해버린 것. 이 사건과 처리가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기록하는 사관도 아예 기가 막혀서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악을 모르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라며 선조를 비판했을 정도.] 무엇보다 임해군은 형제간의 [[우애]]도 나빠서 친동생인 [[광해군]] 때문에, 자기가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해군을 미워했다고 한다. 이는 [[적반하장]]보다는 광해군에게 임해군이 품은 일방적인 [[열등감]]에 가까울 듯하다. 광해군도 그런 임해군을 증오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명색이 친형이라는 작자가 [[왕실]]의 모범을 보이고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힘을 써서, 왕족에 대한 [[여론]]을 계속 깎아먹고 있으니, 어떻게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세자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친형제가 아니라 원수였을 터이다. 임해군이 올바르게 처신했다면 장자로서 유력한 세자 후보가 되었을 터이니 광해군을 질투할 이유도 없을 일이었다. 이렇게 임해군은 백성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형제마저 학을 뗄 정도로 인성과 행실이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선조도 명색이 장남인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선조 자체도 임진왜란때 무능을 반복하던 막장왕이었기 때문에 임해군이 인간쓰레기짓하는 것이 잘 제한되지 못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가족 중 임진왜란때 극찬받을만큼 똑바로 살았던 사람은 [[광해군]] 밖에 없다. 선조가 양위 후 명나라까지 도망가려던 시도가 신하들의 강한 반발로 실패하자, 양위도 안하고 상세한 국정지시도 없이 광해군에게 실질적인 국정을 맡겨버리고 국경지역인 정주(신의주)로 도망가서 눈치만 보고 있을때, 광해군은 왜군들의 위세를 헤치고 용감히 강원도로 가서 국정과 민심을 열심히 살폈다. 심지어 임진왜란 시작할때 고작 17살, 요즘의 고등학생 나이였음을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근데 막상 왕이 되고 딱히 재평가할것도 없이 부친 선조만큼 후진 왕이라, 주기적으로 서인쪽 사람들 등 마음에 안드는 신하들을 핑계대서 죽여대고 당파싸움을 나쁜 쪽으로 끌고가게 만들었다.]] 개막장이라 불러도 할 말 없는 임해군의 더러운 인성을 보면 그가 왕이 될 경우, [[연산군]]보다 심한 [[암군]]이자 [[폭군]]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연산군도 세자 때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고 왕이 된 이후 10년 동안 정치는 나쁘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의 사사를 명분으로 [[살인마]]가 되어 무자비한 [[갑자사화|숙청]]을 가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을 고통받게 한 것이 문제.] 다만 선조는 임해군을 세자로만 안 삼았을 뿐이지 거의 모든 조정 대신들에게서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데도, 계속 자기 아들을 감싸기만 했다. 이에 임해군도 기고만장해졌는지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당연히 광해군도 이렇게 만행 밖에 저지를 줄 모르는 동복형 임해군을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고[* 임해군이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열심히 살아도 모자른 판에 범죄만 저지르고 다닐때, 광해군은 정반대로 살았다. 조선의 피해현장들을 목숨걸고 찾아다니며 문제들을 수습하는 행정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세자(광해군)를 칭송하는 조선 백성들이 많았고, 선비들도 광해군에 대한 신뢰가 갑자기 높아졌다. 현대 학계에는 임진왜란 초기 세자(광해군)의 훌륭한 태도와 노력이 당시 자발적 의병 지원자들을 확 늘리는 전사회적 동기였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 ],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가 끝끝내 감싸고 돌아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임해군을 거의 유일하게 비호해주던 선조가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훗날 [[영창대군]]을 지키기 위해 사실상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서인]]과 [[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 당파를 초월한 모든 곳에서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북인, 서인, 남인 등 모든 당파가 임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남인 내에서는 [[이원익]], [[이덕형]], [[정구]], 홍가신, 서인 내에서는 심희수, [[이항복]], 북인 내에서는 [[정온]] 등이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제가 뭘 잘 몰라서 [[역적]]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라고 납작 낮춰야 했다. 남인 내에서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른 당파보다 많았기에 《하담파적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은 남인이 역적을 비호하였다며 공격해 남인들 중에 [[죄]]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안방준]]의 《혼정편록》의 기록에서 나온 [[이귀]]가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대북파가 소북은 [[유영경]]의 당, 서인은 [[김제남]]의 당, 남인은 임해군의 당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파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옥사 과정이 한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해군이 고변을 들었을 때야 "내 형이 그럴 리 없다." 했지만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 사실 이 정도는 일반적인 수순이다. 조선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가 [[역모]] 사건에서 형식적인 말조차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결론부터 먼저 내린 후 원인을 밝혀내는 황당한 과정을 거친 것. 결국 광해군은 임해군을 붙잡아 [[교동도]]로 [[귀양]] 보내버렸고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의문사]]했다.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거나 사사했을 것이라는 심증만 제기될 뿐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불명이다.[* 사실 원래 계승 경쟁에서 밀려서 왕족을 죽인 경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이렇게 되어 있다. 게다가 암살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들은 '사망자들이 불행히 혹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식으로까지 기록되어 있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자기가 찝찝해서 죽였다고 그대로 대놓고 보여지기 식으로 기록되었다가는 자신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이다.] 훗날 [[인조]] 때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는데 이 독살설도 '[[반정]] 세력의 [[권력]]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임해군도 자기가 살 길을 모르는지 맨날 무사들과 어울리고[* 이 때문에 초반에 임해군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잡힐 것 같자 [[여장]]을 하고 도망쳤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마당에 도망까지 쳐서 아예 역적 인증을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