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궁성 === ||<:>사진 ||<:>설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1.qq.com/6047630.jpg|width=100%]]}}} ||<(>'''[[천안문]](天安門)'''[br]황성 의 남문. 베이징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있었고, 내성안에 황성이 있었다. 그 황성안에 자금성이 있다. 황성도 자금성에 포함되었던 명청시대에는 자금성의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자금성의 정문이 아래의 오문(午門)으로 바뀌었다.[* 황성에 포함되지 않았던 대명문(大明門)은 청대에 이르러 대청문(大淸門)으로 바뀌었다가 청 멸망때 쯤에 중화문(中華門)으로 다시 한번 바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천안문 광장 조성 때 철거되었다.] 1417년(영락 15) 건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천순 1) 벼락을 맞고 1465년(성화 1)에 중수했으며 1644년(숭정 17) [[이자성]] 군대의 베이징 점령 때 소실되었다가[* 정확히는 적군이 성을 탈취하지 못 하도록 화재를 일으켰다.] 1651년([[순치제]] 8)에 재건되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케하고 백성을 다스리다(受命于__天__, __安__邦治民)'라는 의미의 천안문(톈안먼)으로 개칭했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과거엔 [[장제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곳 앞에 펼쳐진 [[천안문광장]]에서 [[1976년]]의 4.5 운동([[천안문 사태]])과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9년에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kdk.net/106.jpg|width=100%]]}}}||<(>'''단문(端門)'''[br]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다. 황제가 조회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eridan_Gate.jpg|width=100%]]}}}||<(>'''오문(午門)'''[br]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이래 1647년(순치 4), 1801년(가경 6)에 중수했다. 정중앙에 있는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9칸(60.05 m), 측면 5칸(25 m)이다.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다른 전각의 4채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황제가 새 달력을 반포하거나 명절에 신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5개의 문 중 가운데의 문은 황제 전용으로,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황제 아닌 사람이 여길 지나갈 수 있는 경우는 국혼날 가마를 탄 [[황후]]가 입궁할 때와 [[과거]] 전시에서 진사급제한 장원·방안·탐화[* 1등, 2등, 3등]가 퇴궐할 때뿐이었다. 가운데 문을 기점으로 문무백관은 동쪽문을, 종실들은 서쪽문으로 출입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orbidden_City_Beijing_Shenwumen_Gate.jpg|width=100%]]}}} ||<(>'''신무문(神武門)'''[br]자금성의 북문.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피휘]]해 신무문으로 고쳤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궈모뤄|곽말약]]이 쓴 '고궁박물원'이라는 편액이 성문에 걸려 있다.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 이곳을 통해 출궁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_Glorious_Gate.jpg|width=100%]]}}} ||<(>'''동화문(東華門)'''[br]자금성의 동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서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1457년]](경태 8) [[탈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 [[정통제]]를 비롯한 정변 세력이 이 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때는 황제, 황후, 황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재궁(梓宮)이 이 문을 통해 나갔기 때문에 속칭 '귀문(鬼門)'이라고도 불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1622673.jpg|width=100%]]}}} ||<(>'''서화문(西華門)'''[br]자금성의 서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동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맞은편에는 황실의 원림인 서원(西苑)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원에 행차할 때 자주 사용했다. [[1900년]](광서 26)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해 [[시안(도시)|시안]]으로 도망쳤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0.blog.xuite.net/5.jpg|width=100%]]}}}||<(>'''각루(角樓)'''[br]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 전각이다. 성벽을 제외한 각루만의 높이는 27.5 m이다. [[경복궁 동십자각]]과 같이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 역할을 한다. [[영락제]] 때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