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후3궁 ==== ||<:>사진 ||<:>설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3.sinaimg.cn/U3059P704DT20080807115840.jpg|width=100%]]}}} ||'''건청문(乾淸門)'''[br]외조와 내정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문으로 보화전 뒤쪽에 있으며 앞으로는 건청문 광장과 마주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1420년(영락 18)에 지어진 이래 1655년(순치 12)에 중수되었다. 동쪽에는 경운문(景運門), 서쪽에는 융종문(隆宗門)이 있다. 담장 서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이 [[군기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275705_STD.jpg|width=100%]]}}} ||'''건청궁(乾淸宮)'''[br]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어졌고 1798년(가경 3)에 마지막으로 중건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는 황제의 침궁이었으나 [[옹정제]] 때 침소를 양심전으로 옮기면서 정식 조회를 여는 편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 [[숭정제]]의 아내 주황후가 이곳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청나라 때는 1722년(강희 61)과 1785년(건륭 50)에 각각 강희제와 [[건륭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건청궁이 유명해진 건 [[옹정제]]가 시작한 비밀건저제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인데, 이곳 옥좌 위에 걸려 있는 [[순치제]]의 어필로 된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 뒷쪽에 제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함에 넣어 보관했다가 황제 사후 왕공대신들의 입회하에 함을 개봉해 차기 황제가 즉위하도록 했다. 부속 전각으로 단응전(端凝殿), 무근전(懋勤殿)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tuniucdn.com/i2FtXA2RGY7B3Tvgl.jpg|width=100%]]}}} ||'''교태전(交泰殿)'''[br]건청궁 뒷쪽에 있는 정방형의 평면으로 된 3칸의 전각이다. 황후의 탄신일인 천추절을 축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건륭제]] 때 대청수명지보(大清受命之寶)·황제봉천지보(皇帝奉天之寶)·대청사천자보(大清嗣天子寶)·황제지보(皇帝之寶) 2과·천자지보(天子之寶)·황제존친지보(皇帝尊親之寶)·황제친친지보(皇帝親親之寶)·황제행보(皇帝行寶)·황제신보(皇帝信寶)·천자행보(天子行寶)·천자신보(天子信寶)·경천근민지보(敬天勤民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칙명지보(敕命之寶)·수훈지보(垂訓之寶)·명덕지보(命德之寶)·흠문지새(欽文之璽)·표장경사지보(表章經史之寶)·순수천하지보(巡狩天下之寶)·토죄안민지보(討罪安民之寶)·제어육사지보(制馭六師之寶)·칙정만방지보(敕正萬邦之寶)·칙정만민지보(敕正萬民之寶)·광운지보(廣運之寶) 등 [[옥새]] 25과를 여기에 보관하면서 왕조가 25대까지 이어지기를 염원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렇지 않았다. 이외에도 1745년(건륭 10)에 제작한 물시계와 1798년(가경 3)에 제작한 서양식 자명종 시계도 보관되어 있는데, 이 시계는 태엽을 돌리면 지금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1.att.hudong.com/01300000046969120197448663911.jpg|width=100%]]}}} ||'''곤녕궁(坤寧宮)'''[br]교태전 뒷쪽에 있는 정면 9칸, 측면 3칸의 전각. 명나라 때는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청나라 때는 [[강희제]]의 두 아내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1653~74)와 효소인황후(孝昭仁皇后, 1653~1678)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옹정제]] 이후로는 곤녕궁의 공간을 둘로 나누어 동난각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국혼 첫날밤을 치렀고 서난각에서는 [[만주족]] 전통 신앙에 따라 날마다 육류를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가 여기서 국혼 첫날밤을 보냈으며 [[선통제]]의 국혼이 이곳에서 거행된 마지막 대례였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