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유명한 장소 === ||<:>사진 ||<:>설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eijinging.zening.info/Dscn8229_m.jpg|width=100%]]}}} ||'''구룡벽(九龍壁)'''[br]영수궁 권역의 황극문 바깥에 있으며 길이 29 m, 높이 3.5 m, 두께 0.45 m로 1772년(건륭 37)에 세워졌다. [[용]] 5마리가 다섯 구역에 나뉘어 새겨졌는데, 이는 <역경>에서 [[천자]]의 지위를 가리키는 명칭인 구오지존(九五之尊)을 상징한다. 산서성 대동(大同)의 구룡벽, 북경 북해공원의 구룡벽과 함께 '중국 3대 구룡벽'으로 불린다. 사실 자금성의 구룡벽은 북해공원 것을 모방한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ebaomonthly.com/g8_1.jpg|width=100%]]}}} ||'''진비정(珍妃井)'''[br]영수궁 북쪽 정순문(貞順門) 내에 위치한 우물이다. 겉모습은 일반적인 자금성 내의 우물과 다를 게 없지만 이 우물이 유명해진 건 1900년(광서 26)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서태후]]가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치기 직전 평소 개혁적인 성향으로 서태후의 눈밖에 난 광서제의 애첩 진비(珍妃)[* [[각순황귀비 타타랍씨|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 1876~1900)]를 우물 속에 던져 익사시켰기 때문이다. 1년 뒤 북경으로 돌아온 광서제는 진비의 시신을 건져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선통제]]가 즉위하자 진비와 자매였던 근비(瑾妃)[* [[단강황귀비 타타랍씨|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1873~1924)]가 진비정 북쪽의 정순문 천당(穿堂) 동쪽에 진비의 위패를 모신 작은 영당을 마련해 회원당(懷遠堂)이라 이름짓고 삭망 때마다 향을 피우며 넋을 달랬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