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잇따른 화재 ====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401255&memberNo=28993175|자금성의 역사]] 천도에 대한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고 전소되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다시 난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난징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명을 처형하고 나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 정벌을 위해 출병하던 중 원정지에서 객사하고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된 다음 능묘에 매장되었다.[* 아직 중건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흐른'''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베이하이]]와 [[중난하이]]이다. 그중 중난하이는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로 사용되어 자금성의 뒤를 잇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1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이때 발생한 화재로 황후의 거처인 곤녕궁에도 불이 옮겨 붙었는데, 아직 안에 있는 황후를 구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주청했다. 그러나 당시 황제였던 [[가정제]]가 이를 물리치고 문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여 아내를 타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야사라는 주장이 있어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하면서 간신히 중건했다.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당시 황제는 당대 최악의 황제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다.[* 이때 재건을 위해 [[대운하]]를 통해 베이징으로 수송되던 막대한 규모의 자재들의 행렬을 목격한 [[마테오 리치]]는 '''한 도시를 건설할 만한 규모'''라고 표현하였다.]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