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이례적인 재사용 ====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청나라는 베이징을 장악한 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남쪽과 서쪽의 [[남명]], [[정성공]], [[이자성]], [[준가르]]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삼번의 난]]이 터져 한가하게 궁전을 새로 지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주족들은 베이징에 입성해 본 자금성의 화려함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의 원성을 들을 게 뻔한 새 궁전을 짓는 대신 자금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청나라는 이자성의 난 때문에 자살한 [[숭정제]]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오삼계]]가 이 명분으로 산해관을 열어줘 청군이 [[이자성]]군을 베이징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기존의 궁궐을 쓰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자금성을 그대로 쓰면서 원래 청나라의 정궁이었던 [[선양고궁]]은 행궁으로 격하되었다. 만주족이 자금성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의 화재 이후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위와 같은 명말청초의 여러 혼란한 사정 때문에 한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전면적인 개보수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국대륙내에서 반청세력들을 모두 일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다.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을 여러번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