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금성 (문단 편집) === 중화민국 ===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청나라 소조정|황실 가족들은 외국 황실의 대우로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이 베이징 코앞까지 다가오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화북 침략으로 인한 유물 파괴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선별해 1만 3491개 상자에 나누어 수도 [[난징]]과 [[상하이]] 일대로 옮겼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난징과 상하이가 연이어 함락되자 이 유물들을 다시 [[쓰촨성]] 오지로 대피시켰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유물들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고 추후 베이징으로 다시 옮기려고 했으나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계획이 연기되었다. 오히려 베이징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베이징에 남아있던 중요한 유물을 추가로 난징으로 옮겼다. 그후 [[국부천대|국민정부가 타이완섬으로 망명할 때]] 장제스는 난징에 보관된 유물들 중 가장 가치있는 유물들이라 판단한 3,000여 상자 정도만 추려 선박으로 [[타이완섬]] [[지룽]]항으로 보냈고, 타이완으로 가져온 이 유물들로 [[1965년]] 새로운 [[국립고궁박물원|고궁박물원]]을 개관했다.[* 이때 화재진압에 쓰는 방화수를 담아두던 쇠항아리의 금박까지 벗겨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대륙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9만 7000여 점'''에 달한다.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여러 곳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이 만큼 남았다. 자금성이 명청시대의 궁궐이라 국민당이 가져간 유물도 명청시대의 궁중유물 위주였다. 2010년 12월 집계된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 종류와 숫자는 다음과 같다. * 서화: 1만 2066점 *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574점 *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155점 * [[청동기]]: 6056점 * 선진(先秦) 시대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500점 * [[도자기]]: 2만 5506점 * 공예품 * 옥기: 1만 2122점 * 칠기: 719점 * [[법랑]]: 2520점 * 자수: 306점 * 직물: 1485점 * 대나무·나무·상아·뿔 조각: 658점 * [[문방사우]] 등 문구: 2379점 * 화폐: 6953점 * 기타: 1만 2457점 * 서적 * 청나라 황실 관련 문헌: 38만 6729책 * 만주어·몽골어 문헌: 1만 1501점 * 수집 서적: 20만 604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