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위 (문단 편집) === 고대(古代)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군주의 칭호)] [[원삼국시대|삼국이 정립되기 이전]]까지 [[한민족]] 계통 국가의 임금들은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그 칭호들은 [[한자]]식 표기가 정착되자 보통 왕(王)으로 번역되어 기록되었고, [[신라]]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고유 칭호를 버리고 왕을 정식 칭호로 채용하기도 했다. 다만 [[연맹왕국]] 단계일 때 연맹체 구성원이었던 군장들이 사용한 고유 칭호가 기록으로 남아있고, 그 당시에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고유 칭호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관등제(官等制) 계급 명칭으로 활용되는 것도 발견된다. 중국의 관제가 도입되면서 그 영향으로 [[오등작]]을 사용한 사례들도 보이는데, 특히 기록이 부족한 [[고조선]]·[[백제]]·[[발해]] 등의 경우엔 고유 칭호들을 발견할 수 없고 오등작이나 중국의 관직명에서 유래된 칭호들이 사용되는 것만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의 임금은 후(侯) 칭호를 사용해오다가 왕(王)을 칭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는데, 칭왕 이후로 '[[비왕 장|비왕(裨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신하가 보인다. 또 [[남려|예군(穢君·濊君)]]으로 불리는 인물도 있어, 예속집단 중에 군(君)이란 칭호를 사용한 사례가 발견된다. 상(相)이란 칭호를 쓰는 인물이 백성들을 사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있고, 조선상이나 [[삼(고조선)|니계상(尼谿相)]]처럼 지명과 결합된 형태도 등장하고 있어, '상(相)'을 관직 이름이 아니라 고조선에서 사용된 작위 칭호의 일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한#s-1|한(韓)]]은 연맹체를 대표하는 '진왕(辰王)' 아래로 각 소국의 임금들이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순서의 고유 칭호를 사용했다.[* [[마한]]은 신지와 읍차 두 칭호만 사용했다.] 가장 높은 칭호인 신지 중에선 신운국(臣雲國)[* [[침미다례|신운신국]]으로 추정.]의 '견지보신지(遣支報臣智)', [[안라국|안야국]]의 '축지분신지(踧支濆臣智)', 신리국(臣離國)[* 한(韓) 78국 중에 신리국에 해당하는 나라를 특정할 수 없다. 해당 기록 원문의 일부 글자가 도치된 것으로 보아 축지분신지를 축지리신지(踧支離臣智)나 축지신지(踧支臣智)로 두어, 신리국을 신분국(臣濆國)으로 정정하여 [[신분활국]]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있다.]의 '아불례신지(兒不例臣智)', [[금관국|구야국]]의 '진지렴신지(秦支廉臣智)'처럼 특별한 칭호가 붙기도 했다. 《[[삼국지(정사)|삼국지]]》에는 [[마한]]의 진왕에게 신속된 [[진한]]과 [[변한|변진(弁辰)]]은 24개국 가운데 12곳이고, 진한과 변진 중에 왕이 있는 나라가 12곳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진왕이 주도하는 연맹체에 소속되지 않은 경우엔 독자적으로 왕을 칭했던 것이라 추정된다. [[부여]]는 임금 휘하에 연맹체 구성원 격으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제가(諸加)'로 통칭하는 '가(加)'들이 있었다. 이런 칭호를 사용한 사례가 [[고구려]]에도 있어, 대가(大加)·고추가(古雛加)·고추대가(古鄒大加) 등이 발견된다. 고구려에서 이 칭호들은 왕족이나 고구려에 합병된 소국의 군장들을 대상으로 수여되었다.[* 대표적으로 [[장수왕]]의 아들 [[고조다|조다]]가 고추대가로 불렸다.] 따라서 부여와 고구려에선 가(加)로 불리는 고유 작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부용국의 임금을 왕(王)이나 후(侯) 등으로 책봉한 사례도 있다. [[백제]]는 [[부여곤지]]와 [[목간나]]처럼 왕족이나 신하를 왕(王)·후(侯)로 책봉하고, 그 사실을 [[육조시대|남조]] 측에 국서로 알려 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 발견된다. 그러나 기록이 부족하여 다른 작위나 고유 칭호들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라]]의 연맹체 구성원들은 '간지(干支)' 또는 '간(干)'이라는 고유 칭호를 사용했는데,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는 그러한 간지들도 [[지증왕]]과 함께 '7왕(七王)'으로 통칭되고 있어, 당시 신라 연맹체에서 왕(王) 칭호가 연맹체의 대표인 임금이 전용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또한 부용 세력의 수장으로 보이는 '촌주(村主)'가 비록 왕으로 칭해지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간지 칭호를 사용하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후일 신라의 임금은 [[보덕국]] 왕을 책봉하거나 [[김주원(신라)|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했고, 부용국으로 거느리던 [[우산국]]이나 [[탐라국]]의 군주를 그대로 왕으로 호칭하는 등, 사실상 [[외왕내제|황제국 행세]]를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7왕'의 사례처럼 왕 칭호를 임금이 전용한다는 개념이 강하지 않았고, 격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종속 세력과 완전히 차별화된 칭호를 사용한다는 개념도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지증왕이나 후일 신라 왕족들의 칭호인 [[갈문왕]] 또한 그와 같은 개념일 것이다. [[가야]]의 경우 [[사비회의]] 참석자 명칭이 열거된 《[[일본서기]]》 기록을 통해 고유 칭호를 찾아볼 수 있는데, 가야에서 가장 강한 [[반파국]]과 [[안라국]] 두 나라의 임금만이 왕(王)으로 호칭되며, 다른 작은 나라들의 임금은 한기(旱岐)로 불렸는데, 이는 신라의 간지(干支)와 같은 계열의 칭호로 보인다. 이외에 한기 아래의 작위로 보이는 하한기(下旱岐)나 차한기(次旱岐), 그리고 귀족 작위로 보이는 상수위(上首位)·이수위(二首位) 등이 등장한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주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점차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해나갔는데, 여러 한민족 계통 국가들은 결국 이 세 나라로 정립되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기존의 연맹체 구성원들이 관료적인 성격을 갖는 중앙 귀족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거쳤고, 종래의 부용 세력이 지방으로 편제되어 그 군장들은 지방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귀족 간의 신분 서열을 규정하고 그 서열에 따라 관직을 배분하는 체계가 등장했는데, 이를 관등제(官等制)라고 한다.[* 각 나라에서 사용된 관등의 등급 명칭은 기존에 사용되던 고유 칭호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고구려의 경우 문헌마다 세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대체로 12~14개 등급의 관등이 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백제는 16개 등급의 관등제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17개 등급의 관등과 골품제(骨品制)를 시행했는데, 다른 두 나라의 제도에 비해 제도의 구성과 운영 방식 등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골품제|해당 문서]] 참조.] 관등제는 출생 당시의 신분을 엄격한 수준으로 규율하여 신분 등급의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였으나, 고구려의 [[대막리지]]나 신라의 [[태대각간]]·[[대각간]] 같이 비상설 관등을 두거나, 신라의 중아찬(重阿飡) 같은 특진 제도인 중위제(重位制)를 통해, 관제 운용의 융통성을 확보하고 신분 간의 갈등을 완화하기도 했다. [[발해]]는 특정한 성(姓)을 가진 유력 가문만 관직을 맡은 것으로 보이므로 귀족 신분이 존재한 것으로 여겨지고, [[고왕|대조영]]이 외교 의전상 신라로부터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받기도 했지만, 따로 관등제를 제정해 운영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나라]]의 관제를 도입한 영향으로, 관품제(官品制)의 산계(散階) 개념과 [[오등작]]에 따른 작위 제도가 시행되어 관등제를 대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발해의 작위 체계에서 고유 칭호는 확인되지 않고, '개국(開國)'이란 표현이 붙은 오등작이 사용되었다. 또한 "허왕부(許王府)"라고 적힌 금석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등작 위에 왕작(王爵)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에는 각 나라에서 신라의 관등 체계를 따온 독자적인 관등제가 시행되고 있었으나 이미 신분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었기에, 골품제처럼 귀족 신분과 그 서열을 규정하기 위해 쓰이지 않고 관품(官品) 개념으로만 쓰였다. 당시 [[호족(한국사)|군벌]]들은 [[절도사|절도사(節度使)]] 같은 중국식 관직을 [[왕봉규|자칭]]하거나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같은 작위 형태의 칭호를 사용하며 외국과 교류하기도 했다. 후삼국이 정립되면서 각 군벌은 왕(王)을 자칭했다. [[태봉]]의 경우엔 신라를 멸도(滅都)로 부르며 적대시하긴 했지만, [[후백제]]나 [[고려]]는 신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는데, 대표적으로 [[견훤]]과 [[왕건]]은 서로 주고받는 서신에서 허울만 남은 신라 왕실을 '황옥(黃屋)'[* [[천자]]만이 자신의 거주지를 누렇게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황제]]'나 '황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도 서로를 신라의 [[역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다.--누가 누굴-- 935년에 견훤과 신라왕 [[경순왕|김부(金傅)]]가 각자 고려에 귀순하자, 왕건은 그들을 고려 백관의 위의 지위로 예우하며 견훤을 상보(尙父)로 호칭하고 김부는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