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야뤄 (문단 편집) === 장징궈의 애인이 되다 === 1938년, 장야뤄는 난창 국민혁명군 6사단 선전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난창 서양의원(南昌西洋醫院)의 간호원으로 재직중이던 어느 날, 그녀가 팀원들과 경극 연습을 하고 있던 중 곽예백(郭礼伯) 사단장 일행이 불시에 찾아와 한 사람을 팀원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성 보안처장 부처장 장징궈 동지다." 장징궈가 물었다. >"방금 이 작은 동지가 아주 잘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장야뤄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장야뤄입니다. 전 이미 어른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난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장야뤄는 피난민들과 함께 간저우로 피신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간저우 전문도서자료실 관리원으로 채용되었다. 그후 항적 동원위원회 서기로 배속되었다가 간지우 청년간부 훈련반에 들어가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해 장징궈의 '청건반' 조수로 추천되었다. 이때 장징궈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장야뤄는 장징궈에게 이미 아내 장팡량(蔣方良)과 자녀가 있고 자신은 두 아들을 둔 미망인인데다 [[장제스]]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의 사회적 입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장징궈의 고백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야뤄는 청간반을 졸업한 후 장징궈에 의해 전문서 비서실의 서기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녀는 '민중순문처'의 책임자를 겸임해 순시를 나가서 도박과 마약을 검문했으며, <청년보> 기자로서 '장빈(章频)'이나 '무이(懋李)'라는 필명으로 청년보에 기사를 게재했는데 때로는 수묵화를 곁들어 동시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장징궈의 거듭된 사랑 고백을 받은 그녀는 마침내 그의 진심에 감동해 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정명(情名)을 정해 장징궈는 혜봉(慧凤), 장야뤄는 무운(懋云)을 썼다. 장징궈는 장야뤄와 극비리에 사랑을 나누면서 아내 장팡량과 친분을 다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장징궈는 아버지 장제스에게 이 일을 보고하려 했지만, 당시 중일전쟁이 갈수록 위태롭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보고할 기회를 찾지 못해 차일파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1941년 여름, 장야뤄가 임신했다.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고, 장징궈는 충칭으로 가서 아버지께 이 소식을 보고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아들이 아내가 이미 있는데도 애인을 따로 두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말에 격노해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당시 전황이 위태로운데다 장제스의 정적들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아들의 불륜을 용납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장징궈와 장야뤄는 장제스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고심했다. 장야뤄는 "차라리 낙태하는 게 어떻겠나"라고 제안했지만 장징궈는 거부했고, 결국 그녀는 여러 친지와 친구들과 함께 구이린으로 가서 아이를 낳기로 했다. 또한 장징궈는 장야뤄가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마칠 때까지 그녀가 맡던 관련 업무를 간저우시 민정부장이자 자신의 친구인 구창위(邱昌渭)에게 맡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