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야뤄 (문단 편집) === 병사설 === 장징궈의 친한 친구이자 총정치 작전부 주임 총통 고문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던 왕성(王升)은 1992년 1월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장야뤄가 이질에 걸렸으나 항생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만 연합보 기자 저우위커(周玉蔻)가 쓴 "누가 장야뤄를 죽였는가"라는 책에서, 왕성이 장야뤄의 쌍둥이 아들들에게 그들의 어머니가 급성 이질에 걸렸고 의사가 치료를 시도했으나 끝내 숨졌다고 말했다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사설을 받아들이기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1. 당시 계림성 병원은 중국 후방 의료병원들 중 의료장비 및 의사들의 수준이 훌륭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중소병원도 고칠 수 있는 그성 이질 같은 흔한 병을 상용약인 항생제를 찾지 못해 못 고쳤다는 게 말이 되는가? >2. 당시 왕성은 구이린에 있지 않았고 장야뤄 옆에 있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장야뤄가 급성 이질에 걸린 게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장야뤄의 곁에 있던 장야메(章亚梅, 장야뤄의 동생), 계창덕(桂昌德, 장야뤄의 친구), 계창종(桂昌宗, 장야메의 친구), 주숙청(周淑清, 구창위의 부인)과 왕 의사 등은 그녀가 급성 이질에 걸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단지 병원에서 항생제를 찾지 못해 사망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1940년 전후 장징궈 담당 주임비서를 지냈고 구이린시 사회과장 겸 군사과장을 지냈던 서군호(徐君虎)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야뤄는 병으로 죽은 것이 확실하며 타살된 것이 아니다. 당시 위생 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항전 시기의 생활 조건도 좋지 않았다. 장야뤄는 아이를 낳은 후라서 몸이 허약했고 세균에 감염되게 되면 곧 병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 주장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나쁘긴 했지만, 장야뤄는 항전 이래 상위 기관에서 근무하며 고정된 경제수입을 가지고 있었고 장징궈와 연애하고 아들을 낳은 후 좋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장징궈는 구이린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매달 200위안을 지원했고 장야뤄 또한 영양제를 사서 복용해 몸보신했다. 그리고 장야뤄가 사망 전에 진료를 받은 광시성 병원은 대후방 의료시설로 수준이 가장 높은 병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