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헌충 (문단 편집) === 부군채 함락과 삼이패왕(三李覇王)과의 대결 === 부군채(扶君寨)는 명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서충현 출신의 이씨 신사들, 이건덕(李乾德), 이완(李完), 이조(李兆)의 삼이(三李)가 주축이 되어 지키고 있었다.(이들은 '서충현지'에 문헌으로도 기록이 있다.) 병사 2천명을 확보하여, 훈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장한충도 쉽게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 세작을 사용했다. 서충현의 관리 선우홍(鮮于紅)이 장헌충에게 항복해오자, 장헌충은 자신의 부하들을 선우홍의 부하로 변장시키고, 술과 닭, 오리, 물고기 등의 음식을 가지고 부군채에 위장귀순을 시켰다. 채주 이건덕이 선우홍과 부하들을 받아들이자, 선우홍은 거짓 정보를 알려주면서 잔치를 벌이게 했다. 그 틈을 타서 장헌충이 공격해오고, 잠입시킨 부하들이 내응하여 부군채는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이완, 이조는 살해되고, 이건덕은 도주하였다. 다만, 서충현지 같은 문헌 기록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정황이 드러나는데, 이조는 가족이 몰살되고 2년 뒤 병사하였고, 이완은 장헌충이 사천을 공격할 때, 사람을 모아 군사를 훈련시키다가 대서정권의 지현 고능운(高凌雲)에게 체포되었고, 의로움을 지키며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이건덕은 장헌충이 쳐들어오자 2만 군사를 모아 장헌충과 싸웠는데, 장헌충이 성도를 점령하자, 이건덕의 친족 10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건덕은 나중에 남명의 영력제 정권에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건덕은 이 지역에서 이조, 이완과는 별도로 활동했는데, 전설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한데로 엮은 것이다. 전설에서는 이건덕의 친족들은 장헌충에게 계속 대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고루채(鼓樓寨) 전설에서는 대서정권의 예부상서 강정진(江鼎鎭)이 고루채에서 군량과 마초를 비축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왕교운(王巧云)이라는 주민이 강정진이 자신을 강간하고 아버지도 죽였다면서 고소하였고, 왕씨 주민들이 나서서 고루채의 문에 써있는 대서정권의 연호를 말똥으로 칠해버렸다. 장헌충이 당사자들을 심문해보니, 왕교진은 이건덕의 먼 친족 조카딸로, 왕씨로 성을 바꿔서 숨어 있었던 것이며, 이건덕의 아들 이룡(李龍)도 성과 이름을 바꿔서 왕교진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들과 왕교운의 부친은 강정진이 장헌충에게 투항한 것을 복수하려고 모략을 꾸몄지만 들켜서 죽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씨 가문은 집요하게 장헌충을 공격했는데, '''이조의 아들 이영경(李映庚)은 대학사 여문숙(呂文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소치(李昭治)를 낳았고, 이소치는 강희연간에 서충현지를 편찬할 때, 장헌충이 선악을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닭이나 개조차 살려두지 않았다고 기록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반면, '''이소치의 외가인 여씨 가문의 후손 한 사람은, 장헌충이 가난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며 맞서다가 조정에 반항한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집안의 도움으로 풀려난 여씨는, 극단을 조직하며 시골로 다니면서, 장헌충은 악당만 죽이고 다니는 좋은 사람이라는 내용의 연극을 공연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