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헌충 (문단 편집) ===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 === 20세기에 청나라가 망하면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사천의 대학살은 장헌충의 짓이 아니고 청나라 군대가 한 일이며 이 학살이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청나라 조정이 모든 책임을 장헌충에게 돌렸을 뿐, 장헌충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야기 중국사를 쓴 역사 소설가 [[진순신]] 등의 인물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선 [[리그베다 위키]]를 위주로 이러한 반박이 퍼져나갔다.[* 중국 사이트인 바이두백과 등에서도 장헌충이 학살자가 아니라고 기술해놓았다.] 우선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이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도 당시 실정과 맞지 않다, 오늘날 장헌충이 가진 '피에 미친 마왕, 악마' 이미지 형성엔 [[명사(역사책)|명사]] 장헌충전이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기록은 농민 반란세력을 폄훼하기 위한 청 조정, 농민 반란군에 가족을 잃은 명나라의 학자, 관리들의 기록이 거의 전부를 자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한 악행묘사의 근거가 촉벽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근거가 빈약한 책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장헌충의 학살자 이미지에 반박하는 측에 따르면, 장헌충의 모토는 바로 '탐관은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확실히 장헌충은 농민봉기 세력이였고, 농민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황족, 귀족, 호족 세력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중경, 상양, 성도를 함락하면서 양왕 주익명, 촉왕 주지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성도를 점령한 후에는 사천의 호족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서양 선교사의 기록에도 교차 검증되는 부분이라 사실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백성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대서국을 세운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고, 특히 3년 동안 군대가 쓸 전량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사천에 진입하고 죽은 년도를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장헌충은 파촉지방을 약탈하거나 징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천을 근거로 힘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고, 그 일환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관청이나 지방호족들이 빼앗은 땅은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장헌충이 죽자 사천의 주민들은 장헌충을 기리면서 장헌충의 소상을 세웠고, 청나라 조정이 이를 무너뜨리자 주민들은 계속해서 다시 세웠다고한다. 그 뿐만 아니라 파촉의 21개 주현이 스스로 장헌충에게 귀순했다고 하는데, 이는 장헌충의 기존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촉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학살한 장헌충을 기릴 이유가 전혀 없을 뿐더러, 파촉 지역이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말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천의 사족들이 다 죽은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재동은 장헌충 지지가 컸던 지역이라 후대에도 장헌충의 제사를 지냈는데 장헌충에게 해를 입은 사천 사족들의 후손들이 화를 내면서 재동의 장헌충 제사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들이 정말로 다 죽었으면 이들이 장헌충에 대해 분노하면서 비난한 기록이 남아 있었을리가 없을 것이다. 장헌충이 사천인들을 모조리 죽여서 사천어가 바뀌었다는 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대에 사천성에 쓰이던 언어가 어떠한 언어였을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관화 계열에 속했는지, 여느 중국어의 방언들처럼 [[한장어족]]에 속하지만 관화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별개의 언어였을 지는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이다. 또한 현재의 사천 관화도 말만 만다린 계열에 속할 뿐이지 베이징 방언을 기반으로 한 [[표준중국어]]와는 꽤 이질적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표준중국어]]만을 쓸 것을 강요하자 쓰촨어를 없애고 있다는 비판이 올라오고 있을 정도다. 게다가 전근대의 군대는 군기를 엄정히 잡고 백성들에게 갈 피해를 막으려고 들지 않으면 약탈이나 살인 등이 비일비재했고, 따라서 백성들이 군대가 오는 걸 극도로 꺼렸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장헌충이 민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장헌충의 군대가 백성들의 호감을 살 정도로 민폐를 적게 끼쳤고, 이는 장헌충이 군기를 엄정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장헌충은 인재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2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계속해서 실시했고, 학당을 건립해 자주 시찰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주현의 책임자나 보좌진으로 썼다. 명나라 관리라 해도 탐관은 죽이되 순관이나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중용했다. 위의 민심을 사기 위한 행보들과 결합해서 보면, 장헌충은 진지하게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그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시사하는데, 이 또한 기존의 장헌충의 학살마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는다.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고자 하는 행동과 그 기반이 될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은 모순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서국은 화폐를 발행하는 등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했고, 나라 꼴을 갖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을 마구 죽여대는 상황에서 국가의 체계가 유지될리가 없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장헌충이 죽자 그의 군대는 사천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청나라와 싸웠고, 청나라는 장헌충이 죽은지 13년이 지나서야 사천지역을 온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책대로 장헌충이 거의 백만 가까운 군대를 죽였다거나, 사천 주민들을 도륙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대학살마의 무리를 따르면서 장헌충군보다 더 강하고 자신들에게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은 청나라군과 맞서 싸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헌충의 사인이 수도 중경이 아닌 곳에서 청군과 맞서다 전사한 것임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청나라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한 이전부터 농민봉기군으로써 명나라군에 맞서서 명군을 여러번 무찌르기도 했고, 사천으로 도망가서도 여러번 명군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가로이 옥좌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일 시간이 있었고, 당장 한 사람이 급한 판국에 사람들을, 그것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어줄 일반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재미삼아 죽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크다. 만약 장헌충이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학살을 일삼는 광인이였다면, 상식적으로 이런 난세에 제대로된 세력을 만들고, 근거지인 산서성에서 패배해서 쫓기면서도 사천지방이라는 큰 지방을 차지하고 나름 나라꼴을 갖추고,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과 쌍벽을 이루는 군벌로 성장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저항한 명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전적이 있는 청나라군에게 학살을 할 동기가 있었으면 있었지, 거사 초기 촉에서 관료층 등의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의 행적을 볼 때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청군에 격렬하게 대항하다 전사한 장헌충에게는 사람들을 학살할 동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헌충이 입촉한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대략 5-6년을 파촉에서 보냈는데, 청나라와 싸우면서 5-6년만에 파촉에서 그러한 대학살을 하는 것은 전근대의 기술력 등을 생각하면 무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쓰촨 고유의 문화나 언어는 아주 멀쩡하게 존재하고, 사천 지방은 지방색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 장헌충이 사람을 마구 죽여서 사천 문화가 없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칠살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실제로 사천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제의 세번째 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한다. >{{{+2 [ruby(天生萬物以養人, ruby=천 생 만 물 이 양 인)]}}}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2 [ruby(人無一德以報天, ruby=인 무 일 덕 이 보 천)]}}}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2 [ruby(鬼神明明自思自量, ruby=귀 신 명 명 자 사 자 양)]}}} 신령은 다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반성하라. 하지만 당시 청나라 정권에 의해 진실이 전부 가려지고 사실이 조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당시 청나라가 학살을 벌였던 양주(揚州)나 가정(嘉定)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 같은 책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고, 이 책들은 청나라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상당히 지독했던 청나라의 문자의 옥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데 비해서, 당시 사천의 대학살을 청군의 행위라고 적은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물 출토 결과 청나라군이 쓴, 청군이 학살을 했다는 내용의 고시가 출토되는 등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또한 당시에는 반청 지식인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청에 대한 가짜 정보나 루머까지도 양산하던 시절인데, 사천의 생존자들로부터 실제 학살자가 청나라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마땅히 남아있을 청군이 사천인들을 학살했다는 기록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반청 지식인층들은 주로 명나라의 관료층이거나 호족과 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반란군이고 관료층이나 호족을 상당히 죽인 전적이 있는 장헌충을 좋게 봐줄 이유가 없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또 장헌충 학살 관련 사료에서 과장된 부분(6억 학살 등)이 있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일지라도, 장헌충이 저지른 학살이 전부 거짓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설령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장헌충이 사천에서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염두에 두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헌충의 학살을 반박하는 측에서도 청나라가 자신의 학살을 장헌충에게 뒤집어씌우고 과장한 부분은 있지만 장헌충 역시 촉에서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천의 도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今统以十分而论之,其死于献贼之屠戮者三,其死于摇黄之掳掠者二,因乱而相残杀者又二,饥而死者及二,其一则死于病也。 >지금 10으로 나누어 그(도촉)를 논해보자면, 헌적(장헌충)의 도륙으로 인한 죽음이 3할이고, 요황(십삼가)의 겁략으로 인한 죽음이 2할이고, 난으로 인해 서로 잔륙하고 죽인 것(장헌충 사후 손가망 등 사천성의 명나라 계열 군벌들의 혼전)이 또 2할이고, 기아로 인해 죽은 것이 2할에 미치고, 그 (나머지) 1할은 즉 병으로 죽은 것이다. >---- >장랑, 《신여록》 결국 장헌충이나 청나라 둘 모두가 사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학살, 기근, 타지역으로의 유출 등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학살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고, (인구의 대부분이 호구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해도)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대폭 감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내리기가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