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북대학교 (문단 편집) === 이미지 === * 전주 시민들의 쉼터나 산책용 길로도 역할을 한다. 특히 벚꽃 피는 기간에 상대 앞 벚꽃길과 로터리~중앙도서관~농대로 이어지는 벚꽃길로 꽃놀이 오는 사람들이 많다.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지역행사도 자주 열린다. 특히, 최근 몇 년전부터 최명희 문학상 시상식을 진수당 [[김병로|가인]]홀에서 하고 있다. 일단, 전주 원도심에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고, 주변에 덕진호수, 건지산, 전주동물원 등 구경할 곳이 많다. --그만큼 늘 오는 커플도 많아서 솔로는 곶통을 받는다고 한다-- * 캠퍼스가 미친듯이 넓어 잘 모르고 전주에 여행왔다가 들렀던 사람들이 놀라고 간다. * 같은 맥락이지만 이 때문에 학교에서 교내 곳곳을 순회하는 미니버스를 2개의 노선[* 순환 노선과 일방 노선]으로 운영하고 있다.[* 기숙사(대동관)에서 출발해서 분수대 광장, 진수당을 거쳐 상대쪽으로 해서 의대로 빠지는 일방노선과 인문대, 정보전산원을 거쳐 공대와 도서관을 거치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는 순환 노선이 운행된다.] * 서거석 前 총장[* 현 전북교육감]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다. 학교 본부가 계속되는 혁신과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총장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신뢰도 높은 편이다. 반면 이남호 총장은 미세먼지 경보 기간에 둘레길을 돌게하는 등의 행동으로 까이는 중. * 이남호 전 총장은 상술한대로 미세먼지 경보 기간에 둘레길을 돌게 한 것 이외에도 학내 구성원들로부터 '한옥 페티시'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이남호 총장 취임 이후 교내 거의 모든 건설 사업에 한옥이 빠지지 않기 때문. 공대, 예대 등 건물이 노후화되어 불편함을 겪는 학내 구성원들은 학생들이 자주 모이는 커뮤니티에 한옥 좀 그만 짓고 노후화된 건물들부터 보수해달라고 말하지만, 학교는 보란듯이 '나라에서 받은 건설비는 전용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학교 홈페이지에 팝업으로 띄웠다.물론 학교를 브랜드화하고 인지도를 높이려는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너무 외부에 비쳐지는 이미지만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총장과 보직 교수단 스스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도 분분한 상황이었다. * 2021년 들어선 이남호 전 총장 역시 서거석 전 총장과 함께 재평가를 받는 중이다.[* 학교의 브랜드화와 약대 유치라는 업적 때문. 학교 수준을 높인 서거석 전 총장이 '''거석좌'''라고 불리듯이 이남호 전 총장도 '''[[한옥]][[본좌|좌]]'''라고 불린다.] 2019년 취임한 김동원 총장은 코로나 19 확산을 고려하지 않는 학사운영, 전공진로설계 교과목 강제 도입, 기숙사비 인상 등의 이유로 이를 규탄하는 총학의 입장문이 발표됐다. * 총학에 대한 이미지는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평범하다. 다만 2015년 7월 들어 총학생회의 실책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겨서 이번 총학에 대한 이미지는 실추되고 있다. 그에 반해 2016년에 새로 출범한 총학생회는 괜찮은 평을 듣고 있다. 특히, 5월에 열렸던 대동제에는 하이트맥주의 후원을 왕창 끌어와서 시계탑 광장에 대규모 놀이 부스를 설치하고 생맥주 300ml을 500원씩 판매하는 등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한 점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 과거에는 전남대, 조선대에 이어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호남권 학생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학교였으나, 근래에 들어 진보적 색채가 희미해졌다. 이를 두고 아쉬워하는 어른들이 많다. 워낙 어려웠던 지역경제 사정으로 인해 7~80년대부터 많은 지역 출신 학생들은 장래의 생업걱정에 몰두해야 했던 사정, 북한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이미 90년대 말 일어났을만큼 학생 운동의 정치 지형 자체가 광주권보다 다양했던 탓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실 4.19 혁명의 스타트를 끊은 곳이 바로 전북대학교이며, 60년대부터 학생 운동이 활발했던 학교였다. 이승만 독재에 맞선 '''최초의 학생시위'''가 1960년 4월 4일에 전북대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의 1호 희생자[* 고 이세종 열사, 교내에 기념비도 세워짐]가 나온 장소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80년대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에 전북대는 군부의 많은 견제를 받았으며,[* [[프락치]]들이 학생으로 위장하여 학생운동을 견제했다고 한다. 80년 이후 전남대와 조선대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정권 측에서 더 전략적으로 관리했을 필요성이 높았을 것이다.] 학생회도 실질적인 대응을 못하면서 타 학교 학생회와 학생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썩은 고구마 받았다는 말도 사실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며, 데모로 인해 전북대 학생이 유명을 달리 하기도 했다.[* 제1 학생회관 벤치 쪽에 군부에 저항하다 이세종 학우가 돌아가신 장소가 있다. 자연대와 제2과학관 사이에는 기념비도 있고.. 시계탑도 자세히보면 이세종 광장이라고 명시되어 있음.] 앞서 문서에 80~90년대 학번 선배들의 증언이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학생회의 미온적 태도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진보적 색채가 희미해졌다고 하는 부분은 이미 90년대 말 IMF를 겪으며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IMF라는 국가적인 사태에 의해 많은 학생들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며, 취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본교 사학과 강사 분께서 '''5공 시절 3S에 스터디가 더해져서 4S의 굴레에 얽혀있다'''는 씁쓸한 농담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전주]] 소재의 대학인 만큼 타 대학들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진보, 반보수 성향이 [[성공회대]]에 필적할 정도로 매우 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