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희철 (문단 편집) === 고교-대학 시절 === 경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 센터를 맡아 한 경기에 31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신입생 때부터 초고교급 기량을 선보이며 경복고를 일약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당시 최강팀이던 용산고[* [[김승기(농구)|김승기]](3학년)-[[김병철(농구)|김병철]](1학년)-[[양경민(1972)|양경민]](2학년)-[[김재훈(농구)|김재훈]](3학년)을 주축으로 1989년 4관왕(춘계, 대통령기, 쌍용기, 전국체전)에 올랐었다.]에 밀려 여름까지 2차례 준우승에만 머물다가, 마침내 8월 종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며 경복고에게 19년만의 우승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198cm니 앞으로 더 크면 얼마나 굉장하겠냐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키는 결국 저 때 키에서 하나도 안 컸다. 2학년때는 새롭게 강호로 떠오른 [[이상민(농구)|이상민]]의 홍대부고와 골리앗 신입생 [[서장훈]]이 입학한 휘문고에 밀리면서 경복고는 춘계연맹전 준우승 한번에 그쳤지만, 전희철은 고교 최강의 센터로 인정받으며 동창 [[우지원]]과 함께 아시아 청소년대회 대표팀에 선발된다.[* 하지만 [[김승기(농구)|김승기]](주장), [[문경은]], [[이상민(농구)|이상민]], [[서장훈]] 등이 포함되어 호화멤버로 불렸던 당시 대표팀은 협회의 어수선한 운영 속에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에 2연패를 당하며 예선에서 광탈하며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3학년때는 [[서장훈]]-[[현주엽]] 1,2학년 콤비가 이끄는 휘문고의 아성에 밀리면서도 2번의 우승(쌍용기, 전국체전)을 더 따낸다. 특히 쌍용기 결승에서 전희철은 휘문고 떡대들과 치열한 골밑 다툼을 벌이면서 무려 29점을 올리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92학번 전체 랭킹 1위[* 2위 겸 가드 1위가 용산고 [[김병철(농구)|김병철]] 3위 겸 포워드 1위가 휘문고 박준영(195cm). 고려대가 이들 1~3위 모두를 싹쓸이하면서 스카웃 시장을 뒤엎어놓는다. 전희철의 중고교 동창이자, 쌍용기 MVP였던 [[우지원]]은 휘문고 [[석주일]]과 포워드 랭킹 2~3위권으로 불렸다.]로 꼽히며 엄청난 스카웃 경쟁과 아버지의 설득 끝에 고려대로 진학한다. 특히 빅맨 양성소라 불리던 중앙대가 강하게 접근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고려대로 결정했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입학 후 초등학교 동창이자 라이벌 용산고의 에이스였던 [[김병철(농구)|김병철]]과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멤버로 출전하지만, 당시 대학농구를 양분하던 연세대[* [[이상민(농구)|이상민]](2학년)-[[김훈(농구)|김훈]](1학년)-[[문경은]](3학년)-[[우지원]](1학년)-[[김재훈(농구)|김재훈]](3학년) 등 대학올스타급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연대는 1993년에 [[서장훈]]이 입학하며 비로소 절정에 다다르지만 이때도 성인 실업팀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국가대표에도 선발되었던 [[오성식(농구)|오성식]]은 스카웃 파동으로 인해 춘계연맹전 이후 연세대 자체 출장정지를 먹고 4학년 한해를 통으로 쉬었다.]와 중앙대[* [[김승기(농구)|김승기]]-[[홍사붕]]-[[김영만(농구)|김영만]]-[[양경민(1972)|양경민]]-[[정경호(농구)|정경호]]-[[조동기]]-안병익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정경호(농구)|정경호]](202cm)-[[조동기]](197cm)-안병익(196cm)으로 구성된 센터진은 당시 대학농구팀 중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때는 아직 [[서장훈]] 입학하기 전이다.)]에 밀리면서 고교시절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이때 고려대 농구부는 아직 고교생 티도 못벗은 전희철-[[김병철(농구)|김병철]]이 곧바로 에이스 역할을 해야할 정도로 선배 멤버들이 부실[* 이들 외에 주전멤버로 포인트 가드 윤호영(180cm, 4학년), 포워드 진현구(190cm, 3학년), 전문수비수 [[이지승]](188cm, 2학년)이 나섰고, 이밖에 빅맨 박권우(4학년), [[전수훈]](2학년) 등이 있었다. 전년도까지 팀의 득점을 책임지던 [[정인교(농구)|정인교]]는 정작 4학년때 내내 부상으로 신음하느라 양철 콤비와 많이 뛰지 못했다.]했고, 특히 라이벌 연세대에게는 MBC배, 춘계, 추계 대학연맹전 및 정기연고전까지 연패를 거듭하다 1학년 마지막에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서야 겨우 한번 이겼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때 승리가 고려대의 연세대 전 공식경기 4년만의 첫 승이었다.] [[1992-93 농구대잔치|농구대잔치]]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산업은행, 경희대 등에게 패하며 예선 9위(5승 8패)에 그쳐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같은 대회에서 라이벌 연세대는 4강, 중앙대는 6강에까지 올랐다. 우승은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 트리오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 준우승은 [[김현준(농구)|김현준]]-[[김진(농구인)|김진]] 콤비의 [[서울 삼성|삼성전자]].] 2학년때 고려대가 ~~서장훈 빼고~~ 또한번의 싹쓸이 스카웃으로 [[양희승]], [[박재헌]], [[박훈근]], [[박규현(농구)|박규현]] 등을 데려오면서, 전희철은 골밑 부담에서 벗어나 좀더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치며 오빠 부대를 이끄는 대학 농구 스타 중 한 명이 된다. 겨우 대학 1,2학년들인 전-[[양희승|희]]-[[김병철(농구)|철]] 트리오(;;;)의 맹활약으로 고려대는 [[1993 대학농구연맹전|대학연맹전]] 1,2차대회를 모두 제패하며 2관왕에 오르면서 수년간 이어진 연세대-중앙대의 양강구도를 3강구도로 재편했고, 전희철 개인은 [[FIBA 아시아컵|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며 생애 첫 국가대표팀 발탁의 영광을 누린다.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도 고려대는 전대회 우승팀 삼성전자와 실업강호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를 연이어 꺾으며 정규리그 12팀 중 4위의 호성적을 거두지만, 이어진 8강 플레이오프에서 [[김현준(농구)|김현준]], [[김진(농구인)|김진]]의 노련미에 말리며 리그 5위 삼성전자에게 1승 2패로 역전패 당하고 만다.[* 이때 만약 4강에 진출했다면 연세대와 재대결이 가능했다. 당시 4강은 연세대-삼성전자, 상무-중앙대] 같은 대회에서 라이벌 연세대가 대학팀 최초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또다른 라이벌 중앙대도 전대회 우승팀 기아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4강에 올랐다.] 오랜만의 8강진출에도 불구, 전희철과 고려대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전희철이 3학년때, 슈퍼루키 [[현주엽]]-[[신기성]]이 가세하면서 고려대는 [[1994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MBC배]]에서 [[이상민(농구)|이상민]], [[서장훈]]이 건재한 연세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이 우승은 신입생 [[현주엽]]의 센세이셔널한 활약과 [[김병철(농구)|김병철]]의 미친 연속 3점포 덕분이긴 했다. 특히 포스트에서는 [[현주엽]]의 존재감이 너무 엄청나, 이미 국가대표 센터였던 전희철이 안보일 정도였다.] 이후 전희철은 현주엽과 함께 대표팀에 불려다니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때 고려대 선수단 뎁스가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기존 베스트 5 중 [[신기성]]-[[김병철(농구)|김병철]]-[[양희승]]이 그대로였고, [[박재헌]], [[박훈근]], [[이지승]] 등 전희철-현주엽의 대타로 나오는 선수들도 대학 올스타 수준이었다.] 고려대는 이어진 [[1994 대학농구연맹전|연맹전]] 1,2차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시즌 3관왕을 달성한다. [[파일:전희철_고려대.jpg]]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고려대는 내로라하는 실업팀들을 연파하며 정규리그 2위[* 기아자동차, 연세대에게만 패하며 11승 2패로, 13전 전승의 연세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10승 3패의 기아자동차.]에 오르며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쥘 강력한 후보로 꼽혔다. 8강에서 중앙대를 가볍게 꺾고 플레이오프 4강에서 만난 상대는 [[1993-94 농구대잔치|전 대회]] 8강에서 중앙대에 패했던 왕년의 강호 기아자동차로, 전대회에서 [[허재|허]]-[[강동희|동]]-[[김유택|택]] 트리오의 노쇠화로 무너졌던 이력이 있었고, 때문에 고려대가 기아를 물리치고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나가리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전희철은 기아와의 이 시리즈에서 유독 높은 필드골 성공률을 자랑하며 고군분투했고 2차전에서 통렬한 드라이브인 덩크를 터뜨리는 등 임팩트를 남기긴 했지만,[* 골밑에서 제자리높이뛰기 덩크만 하던 토종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명장면으로, 한동안 SBS 농구 중계방송 타이틀 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골밑을 장악하지 못하고 계속 자유투라인 근방의 2점슛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대학시절 내내 전희철의 이런 중거리 2점슛 성공률은 실로 엄청났고 이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주엽도 골밑을 돌다가 계속 외곽으로 빼주며 [[김병철(농구)|김병철]]-양희승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둘이 결론적으로 김유택-한기범에게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 외곽이 다 터지는 날은 기아나 연세대나 노답인 팀이 고려대였으나, 모든 선수가 한날 다 터질 수는 없는 일. 2차전은 26점의 [[김병철(농구)|김병철]]을 비롯해 양희승 전희철이 모두 터지며 기아를 격파했으나, 결국 고려대는 기아에 1승 2패로 패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고, 역시 패배의 원흉으로는 전성기를 지난 [[김유택]]-[[한기범]]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을 보이지 못한 전희철-현주엽이 함께 꼽혔다. 4학년이 된 전희철은 한살씩 더먹은 베스트 5 [[신기성]]-[[김병철(농구)|김병철]]-[[양희승]]-[[현주엽]]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를 거의 사기 수준의 강함으로 이끌면서 대학 농구를 제패했고,[* 1995년 한해 열린 대학농구 5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전대미문의 5관왕을 달성했다. 심지어 2개 대회는 전희철-현주엽이 국대 차출로 없이 치렀다.] 이어진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1993-94 농구대잔치|2년전 대회]]의 연세대에 이어 사상 2번째 정규시즌 전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특히 정규리그 [[SBS|서울방송]]과의 경기에서, 앞서가던 경기가 서서히 쫓기자 [[레지 밀러|혼자 힘으로 드라이브인 2번, 덩크슛, 3점슛까지 혼자 9점을 몰아넣으면서]] 승기를 가져오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정규리그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막강한 나머지 당시 고려대는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 1순위였다. 특히 백코트 [[김병철(농구)|김병철]](대회 3점슛 1위, 성공률 1위) 양희승 신기성의 외곽포는 전년보다 더욱 위력적이었고 전희철 또한 위에 기술된 바와 같이 커리어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4강에서 또다시 만난 허동택 트리오의 실력과 관록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강이었고 여기에 역대급 스포인 김영만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이들의 위력 앞에 전희철을 비롯한 고려대 선수들은 정규 시즌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결국 기아자동차에게 1승 2패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만다. 특히 매 경기 접전이었던 전년 시리즈보다 더욱 김빠진 것이 3차전은 무기력 그 자체로 후반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노장 듀오 [[김유택]]-[[한기범]]을 상대로 전희철-현주엽 콤비는 해설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화려한 플레이를 연이어 선보였으나, 김유택에게 계속 손쉽게 득점을 내주는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김유택]]을 상대로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다 손쉬운 골밑 점수를 헌납하는 장면을 여러차례 보여주는 등 정작 실속이 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