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기룡 (문단 편집) ===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명나라)|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기준이 딱 나뉘는데 이순신과 권율은 바다와 육지에서 일군을 이끄는 원숙한 지휘관이고 한명련과 정기룡은 저돌적인 용맹으로 출세한 30대 젊은 장수들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손꼽히는 용장은 개전 초에 전사한 [[신립]]을 제외하고, [[황진]], [[장윤]], [[이종인]] 등이 들어가는데, 정기룡도 이들 못지 않은 혁혁한 무용을 보여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운|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 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51130100812.384.3.jpg]]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며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