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나라 (문단 편집) ===== [[자산(춘추시대)|자산]](子産)의 개혁 ===== 이처럼 정나라는 군주의 힘이 약했다. 거기다 목공의 아들들의 후손들인 방계 공족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목공의 아들 중 예닐곱의 자손의 세력이 강해 그들을 '''칠목'''(七穆)이라고 불렀다. 공자 거질(자량子良)의 자손 '''양씨''', 공자 희(자한子罕)의 자손 '''한씨''', 공자 비(子駟)의 자손 '''사씨''', 공자 발(子國)의 자손 '''국씨''', 공자 언(子游)의 자손 '''유씨''', 공자 평(子豊)의 자손 '''풍씨''', 공자 곤(子印)의 자손 '''인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나마 [[정간공|간공]](簡公) 때 재상으로 임명된 [[자산(춘추시대)|자산]][* 목공의 손자이자 공자 발의 아들로 이름은 교(僑)이다. 자산은 그의 자다.]의 개혁 정치를 통해 잠시 부흥하기도 했다. 자산은 25년 동안 재상을 지냈는데 일련의 교묘한 외교 활동을 통해 국력이 약한 정나라를 열강 사이에서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지위도 존중받게 되었다. [[공자]]가 자산을 그토록 높게 평가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산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통치 집단 내부의 암흑, 정치 문란, 민중들의 무법, 불법 비리 등 범국가적인 혼란에 맞서 먼저 국가 질서를 정돈하는 일부터 손을 댔다. 법규와 제도를 건전하게 다듬고, 통치 기구의 등급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각종 법률 조항을 형정(刑鼎)에다 새겨 전국에 반포했다. 자산은 각종 엄격한 제도를 실행하기 시작했는데 줄곧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정나라에서 이런 조치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망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냈고 심지어는 노래까지 만들어 자산을 저주했다. 그러나 자산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시정 개혁을 굳세게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3년 ~ 5년 사이에 정나라의 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노래를 지어 자산을 칭송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자산이 병이 든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자태숙(子太叔)이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차마 엄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정나라에 도적이 갈수록 늘고 사회 치안이 혼란에 빠졌다. 자태숙은 "그 분(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골치는 없었을 것을"이라며 후회했다. 그리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무력으로 잡아들이고 죽였더니 사회 치안이 비로소 나아졌다. 정나라는 오랫동안 대국 세력에 의해 통제당해왔기 때문에 통치 계층 내부의 귀족 세력도 이해 관계에 따라 상호간 모순된 입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권력 쟁탈을 위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도 그칠 날이 없었다. 자산은 재상이 된 뒤 국내의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압적인 수단으로 나간다면 각종 세력이 연합하여 반발할 것이 뻔했다. 더구나 자산의 집안 즉 국씨는 칠목 중에서 위계가 낮은 축에 속했다. 그는 잠시 모순을 이용하여 양측 모두 상처를 입힌 다음 다시 하나하나 징벌하는 책략을 구사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군주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정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의 성패가 매우 중요했다. 자산은 집정 기간 동안 제후들과 여섯 차례 이상 동맹을 가졌는데, 민첩한 외교 수단으로 정나라의 굴욕적인 모습을 바꾸어 명예와 지위를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