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민철/선수시절 (문단 편집) === 진출 이전의 분위기 === 사실 98년 시즌 이후 시점에서 정민철은 이미 구단 승인 하에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당시 관련 자격 조건은, "'''해외 진출 가능: 7시즌, FA취득: 10시즌'''"이었다. 대졸선수가 대부분인 당시 여건상 해외진출이나 FA나 다 늙은 뒤에나 가능한 극악한 조건이지만, 정민철은 당시에 유일무이한 고졸 출신 해외 진출 대상자였다. 참고로 [[류현진]] 이전에 30세 미만의 나이로 해외진출한 한국프로야구 출신 투수는 정민철 단 한사람 뿐이다. 사실 제도 시행 이전부터 정민철의 존재는 일본 구단들에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중반 무렵 스프링캠프에서 한화의 연습경기 상대였던 한 일본 팀 감독이 "정민철 같은 투수를 가진 한화 감독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정민철 본인의 경우, 이미 해외진출 의사를 명확히 밝힌 상태였다. 해외진출 자격을 처음으로 갖춘 98년에는 일단 한화 구단이 “팀 우승은 한번 하고 가야지”라는 핑계로 불허했으나, 99년은 시즌 시작 전부터 사실상 해외진출을 약속한다. 이는 다음해인 2000 시즌 종료 이후 정민철이 [[FA 제도|FA]] 자격을 취득하기 때문. 그러니까 1년 먼저 해외 진출하면 거액의 이적료를 받지만, FA되면 [[그런 거 없다]]는 것. 따라서 99년 시즌 시작 전부터 정민철과 구단 사이에 해외진출이 약속된 상황이었다. 마침 99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나 구단이나 해피하고 쿨하게 해외진출이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이전부터 한국 선수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오릭스는 99년 10월 14일 최초로 정민철, [[구대성]], [[정민태]]의 신분조회를 공식 요청, 선빵을 날렸다.[* 참고로 오릭스는 저 찜했던 세 명 중 기어이 구대성을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0월 말 경 거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신분조회를 요청하고 나선다. 일본에서 가장 명문으로 알려졌고 자본력이 앞서는 요미우리가 표면에 등장하자 오릭스는 그야말로 [[데꿀멍]]에 닥치고 버로우. 결국 정민철 영입에 나서는 일본 팀은 사실상 요미우리가 유일무이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11월 19일에 '''[[MLB]]사무국에서도 크보에 공식적으로 정민철의 신분조회를 요청'''하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시스템 상 어느 팀에서 요청한 것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후보는 세 팀. 정민철에게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시애틀 매리너스]], 한국 선수라면 닥치는대로 찜부터 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 [[한일 슈퍼게임]]에 스카우터를 파견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력한 후보. 하지만, 나중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컵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민태]]와 고등학생이었던 [[권윤민]]도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는데, 이중 권윤민은 며칠 뒤 컵스와 계약했기 때문. 물론 여러팀에서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만...] 따라서 분위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vs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되었는데, 이게 2010년대라면 팬들이 “아니 왜 메이쟈 안 가고 일본 감?”이라며 난리법석을 부렸겠지만, 때는 서기 2000년. 메이쟈에서 평범한 선발 중 일인이 될 바에는 일본에서 에이스 노릇하는 게 더 명예롭다고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여론은 일본 진출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입 의사는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시애틀은 이미 2년 전부터 정민철을 지켜봤다고 알려졌으며, 컵스 또한 일단 한번 와보시라고 비행기 티켓을 보낼 정도였다. 선수 본인은 끝까지 요미우리 vs 므르브를 놓고 갈등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컵스를 상대로 트라이아웃 참여 의사까지 밝힌 상태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076&aid=0001997681|기사]]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요미우리였다. 계약금 1억엔, 연봉 5천만엔, 이적료 2억 5천만엔.[* 다만 확실히 공개된 액수가 아니라 추정보도된 액수이다. 연봉의 경우 8천만엔이라는 설도 있다.][* 1999년 11월 환율(100엔=1153원) 기준으로 계약금은 약 11억 5천만원, 연봉은 5억 7천만원 이상, 이적료는 29억 이다. 이 물가는 지금 물가가 아닌 '''20년 전 물가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실제 가치는 더욱 커진다.'''] 저 위 링크에서 본인이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MLB에서 평범한 투수가 되는 것보단 일본에서 에이스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도 높고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듯하다.[* 일본위키에 따르면 정민철이 당시 일본의 인기 걸그룹 [[SPEED]]의 팬이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설마... 이게 일본행에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그런데 98, 99시즌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정민철의 구위가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의구심은 존재했다. 부정적인 것은 아예 보도 자체를 하지 않았던 당시 언론 관행 상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화팬들은 이 문제로 근심, 걱정, 초조, 불안,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웬만한 야구 관계자들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상태.[* 98년 하반기부터 정민철 경기를 중계할 때마다 해설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구속하락'을 언급하다가, '하지만 여전히 공끝은 좋음’, ‘정민철 정도면 베테랑이니까’ 라는 식으로 멘트를 마무리하던 상태였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팔꿈치 통증’이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이상, 몸만 멀쩡해지면 구위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존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