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민철/선수시절 (문단 편집) === 1992년 ===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일단 동기[* 유급한 경력이 있어 1년 후배들과 프로 입단 동기이다.]들이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s-1|조성민]], 손경수 등으로 고교 시절부터 이름값이 화려했으며, 정민철은 최고구속이 아직 138km/h 정도밖에 나오지 않던 완성되지 않은 투수였기 때문. 하지만 당시 정민철을 보았던 사람들은 볼끝이 좋아 대형투수의 자질이 엿보였다고 한다. [[김영덕]] 감독이 '[[박찬호]]와 정민철은 꼭 잡아달라'라고 했다는 소문도 있고. 어쨌거나 1992년에 정민철은 본인의 발로 빙그레를 찾아가 입단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로에 직행하기보다 일단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다소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런 선택을 하게된 것은, 중학교 때 키가 자라지 않아서 1년 유급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때 정민철이 프로에 바로 입단한 것은 [[신의 한수]]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성민, 박찬호처럼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그렇다쳐도, 92학번엔 [[박재홍(야구)|박재홍]], [[차명주]], [[전병호]] 등 경쟁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들과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했다면, 이름값에서 밀린 정민철의 프로 데뷔가 과연 순조로웠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데뷔 첫해, 정민철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팀내에서도 1차지명 신인인 대졸 출신 [[지연규]][* 결국 지연규는 부상에 허덕이다 1998년을 끝으로 은퇴했지만, 2001년에 복귀했고,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인 2002년에 비로소 의미있는 활약을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정민철이 내리막을 타던 시기에 지연규가 계투진에 등장했던 것.] 가 훨씬 조명받던 시기라 해외 전지훈련에서도 제외됐었다. 그런데 지연규가 아마 시절 때의 무리와 스프링캠프 시절의 과도한 구위 끌어올리기로 컨디션에 난조를 보였고, 대신 정민철이 개막전 엔트리에 들게 되었다. 비록 LG와의 개막 2연전에 만루홈런을 맞기도 했지만, 이후 [[불펜#s-3|불펜]]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해태 타이거즈|해태]]전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선발진에 합류했다. 평균자책 2.48, 195 2/3이닝, 14승4패 7세이브, 10완투로 신인, 그것도 고졸 출신 투수로서는 기대를 뛰어넘는 기록을 남겼으나 하필이면 같은 해 [[염종석]]이 있었다[* 그 해 정민철이 기록한 특정 팀(VS 쌍방울전) 3완봉승은 86년 빙그레 [[한희민]]이 거둔 순수 신인 특정 팀 최다 완봉승(VS 청보전)과 타이 기록이다]. 염종석은 평균자책 2.33로 시즌 1위를 차지했으며 17승9패 6세이브, 13완투를 기록해서 정민철보다 앞선 성적을 기록한데다가, 데뷔 첫 승부터 9승까지의 승리가 완투승이라는 것도 이슈가 되었다. 둘이 완투 대결을 했는데 3:1로 롯데가 이긴 경기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도 둘의 명암이 엇갈린 탓에[* 4차전에서 정민철은 패전 투수, [[염종석]]은 승리 투수.] 결국 신인왕과 골든글러브가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정민철의 콩라인 전설이 시작된다~~ 당시 정민철과 염종석의 활약은 종전까지 대졸 후 입단이 당연시되던 한국 프로야구에서, 고졸 신인의 선전 가능성을 확인시킨 사례로 기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