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민철/선수시절 (문단 편집) == 은퇴, 2009년 == 두 번째 FA를 맞이했지만 예상대로 신청하지 않고 2억1천에 도장을 찍었다. 오프시즌에 체력적인 문제를 보강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떨어진 구위를 되살리기 위해 릴리스포인트를 앞으로 당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1, 2군을 왔다갔다하면서 위기에 '''상당히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 6월 6일 VS [[SK 와이번스|SK]]전에서 3회초에 실책성 3루타를 맞은 후 계속 안타를 맞아 결국 6점을 내주고 강판 당하는 등 2009년들어서는 잘 막더라도 위기에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신인이라면 이게 경험으로 커버가 될 수 있지만, 정민철이 1972년생이고 고참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아예 약점으로 잡혀버렸다. 거기다가 살도 예전보다 더 많이 쪄서 전성기 시절 '''[[미소년#s-1|미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전후사정을 볼때 이미 시즌 전부터 구단쪽에서 은퇴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은 한화의 몰락이 세살 꼬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진 해. 구단 안팎으로 [[리빌딩]] 요구에 대한 목소리가 거세던 때이다. 실제로 [[송진우(야구선수)|송진우]], [[문동환]], [[최상덕]] 등이 이 해에 한꺼번에 은퇴했다. 이런 상황은 정민철 본인도 감지하고 있었을터. 구단이 플레잉 코치 자리를 제의하자 큰 갈등없이 받아들이고 보직을 이동, 사실상의 은퇴 수순을 밟았다. 결국 송진우의 대기록을 제대로 좇지도 못한 채 2009시즌 후반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9월 12일, 은퇴식을 가졌다. 하지만 은퇴 경기는 후배 양성을 위해 자진해서 거절했다. 은퇴 경기를 위해 1군에 등록될 경우, 후배 선수 중 한 명이 자신을 대신해서 10일간 1군 엔트리에서 빠져야 되기 때문. 항상 순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정민철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은퇴식이 있는 [[한화 이글스/2009년/9월/12일|2009년 9월 12일]]에는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인 [[한밭 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구장]]은 무료 입장을 시행하였으며 'ACE 23'이라고 새겨진 수건을 입장객 전원에게 증정하였다. 이날 히어로즈 VS 한화 이글스의 경기는 [[김혁민]]의 막장투구로 히어로즈가 9점을 먼저 올리면서 패배로 끝을 내는가 싶었지만, 4회말 분노의 3[[홈런#s-1|홈런]]으로 한화가 스코어 9:7까지 따라잡으며 분전, 5회 말 클리닝 타임에 시행된 정민철의 은퇴식 이후에는 한 점도 내주지 않고 9회말 [[이범호]]의 1타점 적시타 후 [[이도형]]이 또다시 끝내기 3점홈런을 날리며 9:11로 승리하였다. 이날 한화는 무려 9점 차이를 뒤집는[* 이 기록은 [[527 대첩|2003년 5월 27일]]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 기록한, KBO 최다점수차 역전승 타이기록이다. 그리고 이는 [[508대첩]]때 SK가 두산을상대로 10점차 역전승을 거두며 갱신.] 저력을 보여주며 정민철의 은퇴식에 승리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http://news.nate.com/view/20090914n09217?mid=s1004&isq=3498|불암콩콩코믹스에도 나와있다. 중간부분부터 보면 된다.]] 은퇴와 동시에 구단은 그의 등번호 23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다만, 이 영구결번과 관련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정민철#s-10|기타]]사항을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