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민태 (문단 편집) == 여담 == * 위에 서술된 대로 [[구대성]]과는 [[한양대학교 야구부|한양대학교]] 선후배 사이인데(좌대성-우민태), 재미있는 사실은 정민태가 1년 선배지만 빠른 1970년생이라 88학번인데, 구대성은 1969년생이지만 학교를 1년 유급한 탓에 89학번으로 들어온 것. 정민태가 그 당시 창궐하던 [[한양대학교 야구부]]의 폭력을 근절시켰기 때문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구대성은 정민태에게 사석에서 '''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구대성의 저서에서도 민태형, 민태선배라 일컫고 있으며 그(구대성)의 생애 중 라이벌을 꼽자면 1년 선배인 정민태라 밝히고 있다. 대학 시절 국가대표 원투톱으로 룸메이트로 함께하며 서로 격려하고 배우는 사이였다고. ][* 스톡킹에서 구대성이 직접 사실이라 증언했다.] *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이전, 사람들이 야구 선수의 병역 사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선수였다. 촉망받는 2년차가 시즌 중에 수감되어 구치소 신세가 되었으니 당시 팬들의 뇌리에 깊게 박힐 수 밖에 없었던 것. 수법은 간단하면서도 대담했는데, 이전에 허리 디스크를 앓았던 자기 형(당시 무직 26세)의 CT를 찍어 제출한 것. 당연히 재검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대비해서 브로커를 통해 군의관에게 뇌물을 제공했는데, 이 브로커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 다만, 이게 정민태와 그 부모만의 문제였냐면 그건 아니었다. 사실 이 사건은 스포츠계를 기웃거리며 이름값을 얻던 한의원 원장 박명득[* 부친이 여고 농구팀 감독이어서 30살때부터 지연, 학연으로 남녀 농구대표팀 주치의가 되어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스포츠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과 당시 [[태평양 돌핀스]] 단장이었던 강창호가 주축 인물이었다. 정민태를 비롯한 [[가내영]], [[김동기(야구)|김동기]]등 선수들에게 돈을 걷은 것은 단장 강창호였고, 돈을 받아 병무청 군의관들에게 전달한 것은 박명득이었다. 한마디로, 구단이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하며 선수들의 병역 비리를 직접 주선한 대단히 질이 안 좋은 사건이었다. 이게 21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무조건 구단 해체각이었을 텐데''', 때는 1992년으로 병역 비리 그까짓꺼...라는 분위기였고 어차피 돌핀스 자체가 곧 선경에 팔리니 마니 하는 상황[* 다만 중간에 협상이 파토나서 이 때 팔리지는 않고, 3년 뒤 현대그룹에 팔린다.] 이었기에 결국 흐지부지 묻혔다. * 선수의 권리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긴 문제, 예를 들어 훈련 방법이라던가 로테이션, 경기 출장 문제 등에서 트러블이 발생했을 경우, '''감독에게 찾아가 대놓고 항의했다고 한다'''. 가장 오랜 기간 함께한 [[김재박]]의 경우 '실력만 좋으면 된다'라는 마인드라서 정민태의 항의와 요구를 그냥 들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 '돈을 밝힌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본인도 알고 있었다고 스톡킹에서 얘기를 했다. 다만 이건 정민태도 억울한 측면이 있는데, 단순히 그냥 돈이 좋아서 자린고비라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사업을 말아먹으며 거액의 빚을 졌었기 때문이라고. 일본에 진출하고자 했던 것도 목돈이 필요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 당장 현대에서 다승왕을 하며 연봉 3억원을 받을 때까지 자기 집도 없었다고 한다.] 정민태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연봉을 더 받아 냈어야 하는 나름의 사정이 있긴 있었던 것이다.[* 당장의 빚 변제는 물론이요, 변제 이후로 본인에게 남는 돈이 있어야 생활이 유지된다. 게다가 정민태 본인 역시 가정을 꾸렸으니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그리고 야구선수 생활은 길어야 40 전후로 끝나니, 그 전에 최대한 돈을 모으는 것이 맞긴 하다.]. 그리고 요미우리를 가게 된 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라 당시 모기업 [[하이닉스]]가 채권단의 손에 들어가면서 구단의 상황이 열악해졌던 현대의 사정 탓이 크다. 오릭스나 주니치도 연봉 자체는 엇비슷하게 책정했으나 이적료 액수는 제법 요미우리가 세게 불렀댜고. 정민태의 이적료 (5.5억엔 / 당시 환율 기준 55~60억 상당) 로 현대 구단을 운영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 선수 시절 부상 때문에 은퇴 이후로도 고생했던 듯하다. 2010년 10월 30일에 있었던 [[KIA 타이거즈]]의 [[김동재]] 코치를 위한 [[천하무적 야구단]]vs일구회 올스타 자선시합이 방송을 탔을 때 정민태가 방송에 나왔는데, 부상이 있어 경기에는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스톡킹에서 심수창이 말하기를 일반적인 캐치볼이나 배팅볼도 던지지 못할 정도로 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스톡킹 차명석 편에서는 심수창이 가장 펑고를 가장 못치는 코치로 뽑았는데 펑고를 못치는 이유도 부상의 여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코치로 있으면서 제 역할을 못 하는 투수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건지 겨우 40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흰머리가 보이고 있다. *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시도하던 당시 [[박진만]]과 함께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 더 좋잖아요."라는 말로 인천 야구팬들의 속을 뒤집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는데 스톡킹에서 잘못된 소문이라고 본인이 얘기를 했다. 당연히 인천 출신인 정민태는 반대를 했지만 모기업이 밀어붙였던 것이며, 이후 "(연고지에 상관없이)어디로 가던지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 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 아들 정시우(개명 전 이름 정선호)가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포지션은 [[외야수]]. 이후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재활 트레이닝 센터를 차렸다고 한다. 앞서 잦은 부상때문에 헬스로 몸을 만들었는데 피트니스 대회에서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를 대표하는 우완투수 이기에 '정민태 vs [[정민철]]' 키배가 상당하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도 많아 양 팀 팬이 아니라면 누가 낫다고 단정하기 힘든 비교.[* [[스톡킹]]에서 이걸 주제로 토론도 했는데 정민태 우위를 주장하는 패널이 정민철.] * 팬 서비스도 역시 KBO를 대표하는 레전드 투수인 만큼 훌륭한 축에 들어간다. 데뷔 초창기였던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 잘해줬고 현대 왕조를 이끌면서 전성기를 보냈을 때도 현대 선수들 중에서는 팬 서비스 좋기로는 손꼽히는 선수였다. 말년에 기량이 상당히 떨어지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을 때도 여전히 팬 서비스는 잘해주었으며 은퇴 후 코치가 돼서도 여전히 사인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잘 해준다. * 심수창의 말에 의하면, 투수들의 밸런스를 잘 잡아주고 선수들과 편하게 잘 지내는 코치였다고 한다.[* 실제로 강정호와 농담을 티키타카 형식으로 주고 받을 정도였다.][* 정민태 말로는 너무 편해서 심수창이 개길 정도라고 한다.] 좋은 팬서비스와 대학시절 폭력 근절 등 미담이 많은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