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명 (문단 편집) === 초년기 === 정종명은 법적으로는 1896년 8월 5일생이며, 본적은 경성 연지동 97번지로 되어 있다. 하지만 [[동아일보]] 1925년 10월 20일자 기사 '독자와 기자-청상과부로 가두에 서기까지'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북도 경주 태생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삼천리> 1931년 기고 '전위선상의 인물평-열성과 근로의 정종명씨, 근우회 여류투사'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동향인 사회운동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회주의 사상가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실제 출생지는 경주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녀는 1929년 <삼천리>에 기고한 회고에서 자신의 나이가 36세라고 언급했다. 당시엔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948년에 출간된 <조선연감>에서 정종명이 1947년 무렵 55세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그녀의 실제 출생년도는 1894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종명은 어렸을 때 두창을 앓은 후유증으로 곰보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에는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다는 언급이 항상 있으며, 그녀에 대한 여러 별명 중 하나가 '정곰보'였다.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11살 때 배화학당에 입학한 것을 볼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명은 4년간 배화학당을 다니면서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부친이 러시아로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되고 어머니 [[박정선(1874)|박정선]]이 홀로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그녀는 1929년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빈궁과 고독과 학대로 다진 인생의 최하층에서 태어나서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모조리 보내었다."고 회고했다. 17살 때 대한의원 통역이었던 박모와 결혼하였고, 19살 때 아들 박홍제(朴弘濟)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그 이유는 당사자의 의사와 개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이혼할 뜻을 품고 기회를 엿봤으나 남편이 곧 병으로 사망하면서 아들 하나를 둔 미망인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21살 때 기독교 전도부인이 되어 성경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하지만 곧 경제적 독립을 꾀하고자 전도부인을 그만두고 간호부로 방향을 돌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