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해준 (문단 편집) == 생애 == 1903년 12월 17일 [[전라북도]] [[금산군]] 군이면 중다리(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1리 410번지)에서 태어났다. 금산공립보통학교(現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821|금산중앙초등학교]]), 금산공립보통학교 부설 공립간이농업학교[* 1913년 부설되어 1921년 폐교되었다.], [[보성고등학교(서울)|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과]], 동경문학원을 졸업하고 [[도쿄대학|도쿄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금산공립보통학교 부설 공립간이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28일, 금산면 읍내 장터에서 열린 [[3.1 운동]] 제2차 시위에 김현재(金現在)·한철종(韓喆宗)·김봉준(金奉俊) 등 20여 명과 함께 참여했다가 이튿날인 3월 29일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018|구속되었다]]. 이후 [[보성고등학교(서울)|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정구]] 및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해준(1929년).png|width=100%]]}}} || || 1929년 5월 4일[* 또는 5월 9일], 경기도경찰부에서 촬영된 사진. || 귀국 후 신문 판매업에 종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금산청년동맹 위원으로 있던 중 군산청년동맹대회에서 정기총회 개최 축하문을 금산청년동맹에 발송했다. 이때 김백일(金百日)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의 실행을 격려하는 등 불온한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적어 동맹대회에 발송했다는 이유로 전주지방법원에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8_06_05_0320|기소되었고]], 결국 6월 1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29&evntId=0034990354&evntdowngbn=Y&indpnId=000002145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군산청년동맹대회에 발송한 문서는 압수당했다. 이듬해인 1929년 4월 27일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적위대 사건에 연루돼 [[서울종로경찰서|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고, 5월 5일 [[http://db.history.go.kr/id/ia_5032_3899|석방되었다]]. 그러나 재차 체포돼 결국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31년에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전주형무소 등지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선일보사]] 학예부장, 충남모다스회사 지배인 등을 지냈다. 또한 1930년 [[일본 제국]] [[문부성]]에서 주최한 전람회에 '[[모란]]'을 출품해 입선했고, 1933년·1935년·1936년·1937년 등 4차례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뇌성상합(雷聲相合)' 등의 작품으로 입선하는 등 [[한국화]]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쌓기도 했다. 1936년 전북일보 금산지국장에 취임했다. 1938년 11월 19일 금산공립농업학교(現 금산산업고등학교) 설치 기성회 발회식에서 기초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당일 총무에 선출되었다. 1939년 1월 1일 [[매일신보]] 금산지국장에 임명되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민족대표외교후원회 선전부 차장 및 선전부장, 독립전취궐기대회 선전부장, 공업신문사 편집고문 등을 지냈고, 민족통일총본부 사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해 전국대회 의장, 중앙본부 문예부장, 조직부장, 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재정위원회 위원장,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 등을 겸했다. 또한 한미원조협정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여자국민당 [[임영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부]](現 [[대전광역시]])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정상열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대한민국과 일본, 중국 등 국제공모전에 심사위원 및 초대 작가 등으로 참여했고, [[대한중석]] 고문을 지냈다. 77세 되던 1979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태평로1가]] [[https://naver.me/FZJWBpnT|신문회관]][* 現 [[https://naver.me/FZJWBpnT|한국프레스센터]]] 화랑에서 [[희수]] 기념전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310190032920202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0-19&officeId=00032&pageNo=2&printNo=11710&publishType=00020|열었고]],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었던 [[호텔 뉴재팬]]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86년에는 서울예술인총연맹 화랑에서 불우아동돕기 개인전을 열었다. 1993년 5월 4일 오전 7시 50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60-31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3050500209130004&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5-05&officeId=00020&pageNo=30&printNo=22162&publishType=00010|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