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형근 (문단 편집) == 생애 == 1945년 9월 2일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에서 아버지 정태중(鄭泰重, 1915. 12. 12 ~ 1992. 10. 22)과 어머니 [[감(성씨)|창원 감씨]](昌原 甘氏) 감화자(甘華子, 1930. 2. 10 ~ )[* 감응실(甘應實)의 딸이다.] 사이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부산 동신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17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부 시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원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중위]])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이후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 1983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어 근무를 하였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보내달라"'''고 검찰에 요청해 정형근이 파견된 것. 안기부에 파견 직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같은 주요 사건을 수사하였으며, 이후에는 공안통으로 방첩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하지만 5~6공 내내 국가안전기획부에 소속돼 있을 때 [[고문]]을 지휘했고, 본인의 지인들을 돕고자 정보부 내 인맥을 활용해 약점을 잡는 등 무리한 일을 많이 벌여 '''주변에서는 찬사를, 정적들과는 불구대천의 척을''' 지게 되었다. 1986년에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심진구(1960~2014)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58222|고문수사를 지휘했고,]] [[서경원]]은 밀입북 사건으로 수사받을 당시 안기부 대공조사국장이었던 정형근이 자신을 직접 고문했다며 석방 이후 폭로했다. 이러한 고문 혐의로 10건 가까이 피소되었으나 무려 23차례나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였고, 이에 검찰이 긴급 체포권을 발동해 체포하려 했으나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 및 당시 한나라당의 철저한 비호 아래 기소를 면할 수 있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814278|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8712_19530.html|MBC]], [[http://news.donga.com/3/all/20000212/7507906/1|동아일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9080&CMPT_CD=A0271|오마이뉴스]]) 이는 아직도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15/0004858543?cid=1014877&type=series&cds=news_media_pc|#]] 정형근이 벌인 일 중 크게 원한을 샀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자식문제를 가지고 협박'''한 것이었다고 한다.[* [[측천무후]] 시절의 혹리(혹독한 관리) [[내준신]]이 심지 굳은 중신들을 압박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즐겨쓰는 등 역사가 오래된 수법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내준신의 경우, 이 방법을 쓰면 결국 내준신 무리들이 원하는 대로 응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이런 연유로 1998년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이후락]], [[전두환]]의 경우처럼 과거 [[김대중|DJ]]를 핍박하거나 죽이려 들었던 사람들이 세간의 예상과 다르게 정치보복 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여생을 보낸 반면, '''유독 정형근만큼은''' 당사자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휴대전화를 바꿔쓴 적도 있을만큼 원한갚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94년 말부터 1995년까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북구(부산)|북구]]-[[강서구(부산)|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을 기록했으며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참고로 2004년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이철]] 후보와 맞붙어서 '''공안검사 VS 사형수'''라는 재미있는 구도가 나오기도... 후술한 것처럼 국회의원 재직 당시에는 소위 DJ정권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저격수'로 명성을 떨쳤다.[* 공안검사 출신의 저격수 이미지는 훗날 [[김진태]]와 [[곽상도]]가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1999년 [[국가정보원]]의 언론대책 문건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나왔다는 폭로를 하면서 정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나, 정작 본인이 폭로 당사자임에도 검찰 조사에 불응하는 등 비협조적으로 나오다가 결국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4042296148|#]] 2002년 9월에는 상임위와 국정 감사를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국가정보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참고. 2003년 10월에는 송두율 교수가 간첩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실체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최고위원 김철수라는 정황까지 폭로하며 심지어 북한의 핵심 세력이 노무현 정부 안에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482045|#]][[https://imnews.imbc.com/replay/2003/nwdesk/article/1973117_30767.html|#]] 여담으로 후술된 디스켓 사건이 바로 이 시기다. 송두율이 간첩이라는 증거가 담긴 디스켓을 입수했다며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증거 제시 요구에 디스켓을 복사한 용지를 제시한 것. 한편 송두율은 1심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는 방북 사실을 제외한 간첩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후배 법조인 [[박민식]]에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에 승복해 정계를 떠나 [[변호사]]로 활동 중 얼마 안 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부임, 2011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2011년부터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말년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서의 행보가 뜬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긴 했다. 평생을 정의롭다고 하지 못할 행보로 일관 했으나, 직업정신에는 충실했는지 [[의료민영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 정형근이라면 이를 가는 진보진영 인사들도 이러한 마지막 전향(?)에는 호평을 했다.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591|#]] [[2023년]] [[10월 4일]] [[http://mbn.co.kr/news/all/4967544|한국유엔봉사단 제6대 총재에 취임]]했다.[[https://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81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