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 (문단 편집) == 여담 == * [[헌제]]와 생몰년이 동일한, 181년 출생 234년 사망이다. * 대부분의 [[삼국지]]는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해서 [[추풍오장원|제갈량의 사망]]으로 끝난다. * 한국에서도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 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성을 붙일 때는 X량이라고 해야 한다. 제갈량은 성이 [[제갈]](諸葛)씨이고, 이름이 '량(亮)'이기 때문. 그러나 X량이라고 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자 수도 맞지 않기에 X갈량이라고 표현하는 듯.][* 예를 들어, [[무한도전]]의 [[노홍철|노갈량]], [[프로듀스 101 시즌2]]의 [[황민현|황갈량]]이나 [[KBO 리그]]의 [[염경엽|염갈량]] 그리고 [[프로듀스 48]]의 [[채정|채갈량]]이나 [[프로듀스 X 101]]의 [[권태은|싸갈량]]]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 [[이후락]]의 별명이 '''제갈조조'''였다. 뒷쪽의 [[조조]]는 [[삼국지|같은 시대]]의 그 조조다.]로 부르는 식. * 눈치가 엄청나게 빠른 인물이었다. [[유봉]] 문제의 경우부터 유봉이 살아 있으면 [[촉한]]이 유봉파와 유선파로 100% 갈라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유봉을 어쩔 수 없이 죽게 했으며 [[양의]]가 어떤 인물인지 일찌감치 간파하고 [[촉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작에 간파해서 자신이 죽기 전부터 이미 인사 배치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의 후임 승상은 [[장완]], 대장군은 [[강유]]로 배치했으며 [[양의]]한테는 불만만 안 하도록 중군사에 배치했다. 하지만 [[양의]]는 자신이 승상이 되지 못했다고 불만을 드러내서 그나마 중군사도 삭탈관직 되었다. 사실 중군사는 양의의 깜냥으로 제갈량에게 받을 수 있는 최대의 관직이었다. *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병법 24편》, 혹은《[[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장원#s-3]]》,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편의십육책]]》그리고 [[태평어람]] 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와 집본(輯本) 제갈량집으로, 현재 남은 집본(輯本) 제갈량집은 [[청나라]] 시대 인물 장주(張澍)가 제갈량의 남은 문장, 편의십육책과 장원,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등을 모은 책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단독으로 입전(立傳)된 인물은 '''제갈량과 [[육손]]''' 뿐이다. 진수는 제갈량전 본문에 11,722자를 사용했으며 마지막 평왈(平曰)에서는 천여자로 제갈량을 평했다. 배송지는 3000자의 주석을 달았다. 이는 선주전보다도 많은 양이고, 정사 삼국지에서 제갈량전보다 분량이 많은 기전은 무제기, 문제기 정도 뿐이다.[* 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 * 후출사표에는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온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의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 다만 후출사표는 위작 논란이 있다.] 뒷날 [[유교]] 문화권에서 제갈량의 삶을 압축하는 문장이라 여겨져 유명한 표현이 되었다. 이는 훗날 [[강희제]]나 [[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다. * 기록상 [[과로사]]가 의심되는 인물이다. * "[[초주]]와 대립했다."는 인상이 있지만, 초주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반대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갈량의 사후이며, 제갈량의 집권기에 [[북벌]]을 반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제갈량과 초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초주의 용모를 보고 비웃은 기록 정도가 전한다. *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사천 지방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사천 분주보다 하북 분주가 낫다."는 말과 "제갈량은 얼간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천 사람들은 못 참고 뛰쳐나와서 싸운다고... * [[한국]]의 [[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시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의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고려)|현종]] 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 [[원나라]] 시절 연극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 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원대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도사에 가까워서, 유비가 황제가 된 이후 고작 3년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이지만,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이외에도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나, [[명나라]] 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제갈량을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 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 잡혀버렸으니, 이에 사람들은 즙을 짜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청나라]] [[옹정제]] 시절, 옹정제는 권신인 융과다를 숙청하기 위해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였는데, 개중에는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180218_1332372819.jpg]] * 위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다. 조상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 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 이름 '량('''亮''')'은 한자문화권에서 이름에 자주 쓰이는 글자 중 하나로 당대부터 이미 널리 쓰였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사마의의 3남인 [[사마량]]과 손오의 2대 황제 [[손량]]이 있다. * 일부 사람들이 [[향료]]이자 [[약재]]인 [[정향]]의 효능을 설명하기 위해 제갈량이 [[입냄새]]가 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http://m.iminju.net/news/articleView.html?idxno=50629|#]] [[조조]]에게 계설향(鷄舌香)을 받은 것도 그래서라고. 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낭설이고,[* 저 링크에서는 [[조조]]가 적국의 재상인 제갈량을 조롱하기 위해 정향을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실제로 제갈량이 재상인 승상이 된 것은 조조가 죽은 후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조조는 결국 위왕으로 남아 죽었고, 그 아들 [[조비]] 대에 이르러서야 [[선양]]받아 [[위나라]]가 황제국이 됐으며, 그 이후에 '''한 황실 복권'''을 명분으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며 제갈량을 승상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조에게 계설향을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정향이 군주를 가까이에서 알현해야 하는 고관들이 썼다는 것에서 조조의 심중을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일화#s-3|제갈량의 일화]] 문서를 참고할 것. * 소설《[[삼국지]]》에서 중국의 남쪽 지방을 정벌하는 남만 정벌로 불리는 부분에서는 사람의 머리(수급)을 쌓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사람 머리 대신에 [[만두]]를 쌓아놓고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와[* 하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정사에 기록할 만한 내용은 아닌 상대적으로 사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의 바탕이 되었다. * 좌천된 인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상당히 천재적이었다. [[요립]]이나 [[이엄]]등이 불평 불만을 할 까봐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재등용해서 아주 중히 써 주겠다."'''라고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 때문에 요립과 이엄이 상당히 조용했다. 반면 제갈량이 사망한 이후 좌천된 [[양의]]는 제갈량처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위나라 귀순'''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가 결국 서민으로 강등당했고, 그러고도 불평 불만을 그치지 않아 결국 성도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 >신은 본래 '''남양땅에서 밭갈며 지내던''' 미천한 백성이라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성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번이나 소신의 초옥을 찾으시어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 >제갈량의 전출사표 중에서 * '''"왜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느냐?"'''면 제갈량 사후 이 "밭 갈며 지내던 남양 땅이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직접 밭 갈던 곳을 '''궁경지'''라고 칭하는데, 동양권에서 삼국지의 인기가 대단한지라 이에 따른 관광 산업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지역 분쟁이 있었는데, [[정몽주]]의 출신지를 두고 [[영천시]]와 [[포항시]]가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다만 이쪽은 문헌상으로는 영천시 출생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 역사적 유명인의 고향이나 연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지역분쟁은 한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종종 벌어지는 현상이다.] 궁경지 논쟁에서 후보지는 2곳으로 압축되어 있는데 [[후베이성]]의 [[샹양]](양번)과 [[허난성]]의 [[난양]]이다. 원래 궁경지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논쟁으로 삼국시대 이후 [[육조시대|육조]] ~ [[남송]]까지 현재의 남양이 남양 완현이라는 기록이 없는데 이후 원나라의 남양현지, 남양부지 같은 자료가 남양 완현이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양번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양번 융중을 제갈량의 궁경지로 인정하고 있으며 같은 하남성 출신 사학자들마저도 양번 융중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양 지역의 첨예한 갈등은 다음 내용에서도 볼 수 있는데 [[청나라]] 대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이 남양 지부로 부임할 때 어떤 사람이 고가형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물었을 때 쓴 시로 고가형은 애매모호한 시를 쓰면서 진땀을 빼며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양 지역간의 제갈량이 밭갈던 곳이 어느 곳이냐 논쟁은 쉬이 가라앉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1990년에 중국 정부가 [[중국우정]]이 삼국연의 특종 우표 2세트를 만들었는데 그 중 1장이 [[삼고초려]]였다. 이 우표의 최초 발행지를 결정하는 와중에 샹양과 난양끼리 서로 다투다가 결국 2곳에서 각자 최초 발행식을 치르게 했다.][* 2003년 중학교 어문교재에다가 10년 전에 삭제한 융중대를 실었는데 여기에 주석으로 융중은 산 이름이며 현재 [[후베이성]] [[샹양]]에 있다고 적어버려서 난양 사람들 1만 명이 서명하는 항의 행사까지 있었다.][* 2008년에는 중국 관영 언론 [[중국 중앙 텔레비전|CCTV]] 어느 프로그램에서 샹양의 도시 광고를 내보냈는데 "제갈 궁경지, 산수양번성"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난양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나타났다.] 근데 정말 웃긴 건, 제갈량의 출생지는 이러한 궁경지 논쟁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제갈량의 출생지는 현재의 [[산둥성]] [[린이시]]. 결국 린이시는 '제갈량문화관광지구'를 설치해 4평방킬로미터 내에 와룡산과 제갈량이 태어난 생가 등을 복원하고 이후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해서 산업을 유치한다. 하여간 궁경지 논쟁에서 샹양과 난양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샹양의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 사이에 샹앙은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이때 일본 대기업의 상무가 제갈량의 광팬이라 나중에 이곳에 이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 공장이 샹양에 지어지고, 융중을 개발해서 국가 관광 단지로 만들고 8~10억 위안의 매출을 올릴거라고 계획하고 있다. 난양의 경우 무후사를 기점으로 한 와룡강문화관광산업단지를 건설했는데 2015년의 매출은 14.35억 위안에 이르렀으며 종사하는 사람은 2만여 명, 그 부수효과로 취업하는 사람은 8만 명에 이를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샹양시의 경우엔 아예 시내에 제갈량 광장을 만들어 놓고 제갈량 동상을 세워놓았다.[* 전근대 기준으로 하면 [[판청구|번성]] 쪽이다.] 한편 《위촉오 삼국사》의 저자 허쯔취안은 "융중은 [[동한]] 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기준으로는 남양군 등현[* 등현 자체가 남양군에서도 최남단 지역이다. 여기서 한수를 건너면 바로 (남군) 양양] 소속이지만 현재는 양번시[* 2010년 이후 양양시] 소속이다."라며 논쟁을 일축했다. * [[제갈량/일화#중국편|일화]]를 보면 [[검]]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현대 [[중국]]의 교육 과정은 [[중학교]]에서 [[출사표]]를 가르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