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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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후한 말에 태어난 인물로 자는 공명(孔明),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시호는 충무(忠武).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소.
유비
유표 치하의 형주에서 유비를 따르기 시작했으며, 유비 사후 촉한의 초대 승상을 지내며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다. 뛰어난 능력 뿐 아니라 탁월한 충성심으로 후대에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훌륭한 신하이자 재상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제갈량의 이명인 와룡과 복룡은 누운 용이란 뜻이다.
2. 상세[편집]
제갈량은 후한 말 형주의 사족이자 군벌 유비의 부하, 그리고 촉한의 승상이다. 형주를 아직 유표가 다스리던 무렵, 그의 아래에서 힘을 모으던 유비에게 기용되었다. 이에 얽힌 사자성어로 삼고초려가 전해진다.
유종이 항복하고 조조군이 남하하자 유비는 하구까지 피난했는데, 제갈량은 하구에서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동맹을 체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유비 세력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적벽대전과 뒤이은 남군 공방전이 마무리되고 유비가 손권에게서 형주를 빌리자, 형주의 여러 군을 맡아 군대를 보급하였다. 유비가 익주로 향했을 때 처음에는 형주에 머물렀고, 익주에서의 전쟁이 격해지자 장비와 함께 물길을 따라 익주로 향하며 현들을 정복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제갈량 최초의 군사활동이나, 그가 얼마나 관여하였는지, 구체적인 전개는 어떤지는 전하지 않는다.
유비가 무리한 원정으로 신생 국가인 촉의 국력을 소진시킨 후, 유비는 자신의 후계자인 유선을 보좌할 보정대신으로 이엄과 제갈량을 두었다. 행정권은 제갈량에게, 군권은 이엄에게 맡김으로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수행하였으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손오와 군사동맹을 회복한 뒤 남만에서의 반란 진압을 근거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남만 전체에 간접적인 복속만을 받은 채로 돌아와 북벌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갈량은 촉의 행정, 인사, 군권, 상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대규모 원정을 입안, 실행하였다. 이엄을 탄핵하여 실각시킨 제갈량은 명실상부한 촉 정계의 일인자가 되어 지속적인 북벌을 주도하였다. 제갈량의 집권 기간 동안 그의 막부가 머무르는 한중은 촉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후임을 지목할 수 있었고, 후임자로 지목된 장완과 비의 역시 한중에서 통치를 이어나갔다. 비의 대까지 제갈량의 정치적 후계자들은 촉한의 전권을 행사했으며, 이는 진지와 황호가 집권한 시기에 들어서야 막을 내렸다.
제갈량의 북벌은 대체로 과단성보다 견실함을 중요시했으며, 1차 원정 이후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촉한은 북벌에 뒤따르는 보급 문제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는 제갈량 개인이나 촉한이라는 시스템의 문제 이전에 전근대 보급 체계의 한계였다. 제갈량은 5차 원정 도중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제갈량은 사망 직후부터 미화가 진행되었으며 당대 기록에서도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남만이라 불리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남조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갈량을 신격화했다. 현재에도 남만 일대에서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과장된 전승들이 전해져 내려오며, 연구자들은 이를 남조 대에 이뤄진 의도적 신격화의 영향으로 본다.[4] 남송 대에 이르러 제갈량은 그의 군주인 유비와 함께 강하게 미화되었고, 원 대의 삼국지평화, 명 대의 삼국지연의를 거쳐 현대에까지 통용되는 제갈량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현대 동아시아에서 제갈량은 강력한 문화적 상징이다. 그가 지나친 장소들, 혹은 신빙성이 거의 없는 민간전승조차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어 판매된다. 한 편으로, 현대 역사가들은 오랜 기간동안 신격화된 제갈량의 이미지를 두고 객관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
예컨데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는 제갈량의 남방 정책이 실질적인 개발로 이뤄지지 못해 국력을 신장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하였고, 존 킬리그루(John Killigrew)는 제갈량의 북벌을 다룬 논문에서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며, 그가 불필요한 전쟁을 유지하였고 원정 전반에 어떠한 중대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성공도 거두지 못했음에도 비운의 영웅으로 포장되었다고 평가했다.[5] "케임브리지 중국사" 의 촉 파트를 저술한 마이클 파머(J. Michael Farmer)는 지나친 제갈량 고평가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비판했다. 통사 레벨을 벗어나 현대 중국 주류 사학계의 논문을 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중국 사학계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에 회의적인 의견이 정설로 인정되며, 이제는 되려 제갈량의 북벌과 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이 스스로를 주류 사학에 도전한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민간전승에서 제갈량은 몇몇 발명품, 혹은 음식의 시초로 전해진다. 그중에 제갈량의 발명품 가운데 사료적으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제갈노, 목우, 유마이다. 제갈노는 기존 연노의 개량품으로 간주되나 정확한 실물은 전하지 않아 개량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고, 목우와 유마는 현대 학계에서 외바퀴 수레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외바퀴 수레와 연노는 촉에 앞서 한 왕조에서 이미 실존했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나타나므로, 이들 역시 엄밀히는 발명이 아니라 개량에 가까우며, 정확한 실체는 전하지 않는다. 목우, 유마는 진령산맥이라는 자연경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원활한 보급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졌다는 기록 바로 다음에 보급 부족이 적힌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근본적인 보급 문제 해결은 불가능했고, 이는 전근대 육로 보급의 한계를 생각해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보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평하는 글에서 그가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썼다. 상국이란 나라의 재상을 일컫는데, 승상의 다른 이름이다.[6]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시기 제갈량은 이미 승상이었으므로 명목상 내지 명예직으로 한 단계 더 윗 자리인 상국에 올랐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후한서 백관지와 진서 직관지 모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설이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승상과 대사도, 상국은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직위였고, 이는 진까지 이어진다.
3. 생애[편집]

3.1. 제갈량의 북벌[편집]

3.2. 추풍오장원[편집]

4. 연의[편집]

5. 인간관계[편집]

6. 업적[편집]

7. 평가[편집]

8. 논란[편집]

9. 관련 일화들[편집]

10. 사상[편집]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노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과 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 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명협 교수는 저서 《제갈량 평전》에서 이글, 「논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이 지은 글인) 「논제자」는 선진 시대 대표적 학문이었던 유가와 묵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자』의 「해폐편(解蔽篇)」은 유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나 묵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갈량이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경향이 드러난다. 그는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주의 많은 명유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가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묵가의 절용(節用)과 절장(節葬) 및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경향도 제갈량이 높이 쳤다. 이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를 학문의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은 듯하다.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이렇듯, 여명협 교수는 저서를 통해 제갈량의 「논제자」가 『순자』 「해폐편」에서 탈태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에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계자서》(誡子書)
한편 《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의 50번째 챕터와 《제갈량 평전》은 제갈량의 계자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명협 교수에 따르면 '담박'과 '영정'이라는 어휘는 비록 단어는 달라도 고요함을 위주로 하는 도교 사상과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마음의 자세' 를 반영했다는 청정무위의 수신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7]
11. 외모[편집]
- 키가 8척(삼국지 시대 기준 1척=23.7cm)에 달했다고 한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9척인 관우나 10척인 여포, 8척인 장비 등 키가 큰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만, 정사에서 큰 키가 언급된 경우는 드물다. 정사에 기록된 인물들 중 최장신은 8척 3촌인 정욱이고, 8척은 제갈량, 허저, 조운 등 몇 명만 해당한다. 이보다 작으면서 큰 키가 묘사된 인물의 경우 7척 5촌 유비, 7척 7촌 태사자 등이 있다.[8] 즉, 제갈량은 당대 기준으로 키가 상당히 큰 사람으로 보인다.
-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亮少有逸群之才,英霸之器,身長八尺,容貌甚偉,時人異焉.)."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위, 촉, 오 창립자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잘 생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연의에서는 흰 피부에 입술이 붉었으며 자태는 신선과도 같았다고 묘사한다. 흰 피부와 붉은 입술은 미인을 상징하는 용어이며, 신선같은 외모는 절세미남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처럼 창작물에서 제갈량을 미남으로 묘사하는 경향은 현대까지 이어져, 고우영 삼국지나 이충호 삼국지 같은 일부 창작물들에서는 마치 여성과 같은 외모로 묘사되기도 한다. 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처럼 성별이 진짜로 바뀌어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 관우의 상징이 수염, 청룡언월도, 적토마, 춘추좌씨전이라면 제갈량의 상징은 학창의,[9] 윤건,[10] 백우선,[11] 사륜거.[12]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동진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과 태평어람 인용 촉서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 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제갈량의 외향 묘사는 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여담[편집]
- 헌제와 생몰년이 동일한, 181년 출생 234년 사망이다.
- 한국에서도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13][14]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15] 로 부르는 식.
-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16] ,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태평어람 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와 집본(輯本) 제갈량집으로, 현재 남은 집본(輯本) 제갈량집은 청나라 시대 인물 장주(張澍)가 제갈량의 남은 문장, 편의십육책과 장원,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등을 모은 책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단독으로 입전(立傳)된 인물은 제갈량과 육손뿐이다. 진수는 제갈량전 본문에 11,722자를 사용했으며 마지막 평왈(平曰)에서는 천여자로 제갈량을 평했다. 배송지는 3000자의 주석을 달았다. 이는 선주전보다도 많은 양이고, 정사 삼국지에서 제갈량전보다 분량이 많은 기전은 무제기, 문제기 정도 뿐이다.[17]
- 후출사표에는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온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의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18][19] 뒷날 유교 문화권에서 제갈량의 삶을 압축하는 문장이라 여겨져 유명한 표현이 되었다. 이는 훗날 강희제나 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다.
- 기록상 과로사가 의심되는 인물이다.
- 초주와 대립했다는 인상이 있지만, 초주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반대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갈량의 사후이며, 제갈량의 집권기에 북벌을 반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제갈량과 초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초주의 용모를 보고 비웃은 기록 정도가 전한다.
-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사천 지방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사천 분주보다 하북 분주가 낫다'는 말과 '제갈량은 얼간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천 사람들은 못참고 뛰쳐나와서 싸운다고...
- 한국의 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시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의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 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 원나라 시절 연극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원대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도사에 가까워서, 유비가 황제가 된 이후 고작 3년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이지만,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이외에도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나, 명나라 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제갈량을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 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 잡혀버렸으니, 이에 사람들은 즙을 짜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위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20] 이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이다. 조상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 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 일부 사람들이 향료이자 약재인 정향의 효능을 설명하기 위해 제갈량이 입냄새가 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조조에게 계설향(鷄舌香)을 받은 것도 그래서라고. 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낭설이고,[21] 실제로 조조에게 계설향을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정향이 군주를 가까이에서 알현해야 하는 고관들이 썼다는 것에서 조조의 심중을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일화 문서를 참고할 것.
- 소설 삼국지에서 중국의 남쪽 지방을 정벌하는 남만 정벌로 불리는 부분에서는 사람의 머리(수급)을 쌓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사람 머리 대신에 만두를 쌓아놓고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와[22]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의 바탕이 되었다.
- 좌천된 인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상당히 천재적이었다. 요립이나 이엄등이 불평 불만을 할까봐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재등용해서 아주 중히 써 주겠다라고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 때문에 요립과 이엄이 상당히 조용했다. 반면 제갈량이 사망한 이후 좌천된 양의는 제갈량처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위나라 귀순이라는 레전드 드립을 치다가 결국 서민으로 강등당했고, 그러고도 불평 불만을 그치지 않아 결국 성도로 압송당하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 알고 보면 인간성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오죽하니 그 위연과 양의조차 제갈량의 낯을 봐서 (적어도 제갈량의 면전에서는) 싸우지 않고 있었을 정도이며 이엄이나 요립 등 좌천된 인물들이 전부다 제갈량의 낯을 봐서 모반을 일으키지 않고 꾹 참았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촉나라의 문무백관들이 더럽고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제갈량을 봐서 참는다인 경우가 매우 많았을 정도였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제갈량의 매력이 최고 수준으로 높은 것은 실존 인물 제갈량의 착한 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 급부로 이게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는데 위연은 후퇴하라는 제갈량의 생애 마지막 명령이자 유언을 어기고 지 마음대로 돌격했으며 양의는 위연을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비의의 명령을 어기고 지 마음대로 위연을 죽여버렸다. 이후가 더 가관인데 양의는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씨를 따르겠다[23] 고 말하는 바람에 서민으로 강등당한 뒤 벽지에 유배되었는데, 모반을 일으키려다 적발되어 검거되었고 그걸 추궁하기 위해 성도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저승으로 도망쳤다.
- 제갈량을 혹평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양 학자들이다. 시대가 변해 현대에 들어서 비판이 나왔다기보다는, 서양이 중국과 교류하는 현대에 들어 제갈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13. 궁경지 논쟁[편집]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신은 본래 남양땅에서 밭갈며 지내던 미천한 백성이라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성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번이나 소신의 초옥을 찾으시어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 중에서
왜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느냐면 제갈량 사후 이 "밭갈며 지내던" 남양 땅이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직접 밭 갈던 곳을 '궁경지'라고 칭하는데, 동양권에서 삼국지의 인기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 고금을 막론한지라 이에 따른 관광 산업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24] 궁경지 논쟁에서 그 후보는 두 군데로 압축이 되어있는데 한곳은 후베이성의 샹양(양번), 또 한 군데는 허난성의 난양이다.
원래 궁경지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논쟁으로 삼국시대 이후 육조~남송까지 현재의 남양이 남양 완현이라는 기록이 없는데, 이후 원나라의 남양현지, 남양부지 같은 자료가 남양 완현이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번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시한다.
1. 서서, 최주평, 석도, 방통, 마량, 방덕공, 황승언 등은 양양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거기다가 제갈량의 큰누나는 양양 호족 괴기의 부인이 되고, 작은누나는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의 부인이 되었는데, 만일 현 남양에서 살고 있었다면 120km나 되는 길을 단시간 내에 왕복할 수 있겠는가?
2. 유비의 영지였던 신야에서 융중까지는 60km로 멀지 않지만 남양은 70km라 1일 이내로 왕복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남양과 완현은 장수, 조조, 유표간 전투가 자주 벌어진 곳인데 과연 여기서 한가롭게 농사를 지을 수가 있나?
이러한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양번 융중을 제갈량의 궁경지로 인정하고 있다. 거기다가 같은 하남성 출신 사학자들마저도 양번 융중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번도 약점은 존재한다.
1. 제갈량전 주석에 인용된 이흥이 쓴 제갈승상고택갈표에는 제갈량의 고택을 면지양, 북쪽에 물이 있고 남쪽에 산이 있다라고 본다면, 면수 이남의 융중은 이에 맞질 않다.
2. 현 융중은 강희년간에 만들어 졌고, 명 양양왕의 묘가 융중에 있다.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면 왜 여기다가 묘를 쓰냐?
3. 악비는 남양 무후사에서 출사표에 대한 제발문을 썼는데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가 남양이 아니면 뭐하러 여기다가 제발문을 남기겠는가?
이러한 양 지역의 첨예한 갈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마음은 조정에 둘 뿐, 선후주를 구별하지 않아 이름이 천하에 드높으니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는가.
청나라대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이 남양 지부로 부임할 때 어떤 사람이 고가형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물었을 때 쓴 시로 고가형은 저런 시를 쓰면서 진땀을 빼며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양 지역간의 제갈량이 밭갈던 곳이 어느 곳이냐 논쟁은 쉬이 가라앉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 1990년에 중국 정부가 여기에 기름을 더 부어버렸다. 한국의 우체국격인 중국우정이 삼국연의 특종우표 2세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1장이 삼고초려였다. 그리고 이 우표의 최초발행지를 결정하는 와중에 샹양과 난양끼리 서로 다투다가 결국 두 곳에서 각자 최초발행식을 치르게 했다. 거기다 2003년 중학교 어문교재에다가 10년 전에 삭제한 융중대를 실었는데 여기에 주석으로 융중은 산 이름이며 현재 후베이성 샹양에 있다고 적어버려서 활활 타는 기름에다가 폭약을 하나 던졌다. 이에 난양 사람들 1만 명(!)이 서명하는 항의행사까지 있었다.
2008년엔 활활 타다 못해 폭발한 이 불구덩이에 중국 관영언론 CCTV가 핵폭탄을 하나 더 던져넣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샹양의 도시광고를 내보냈는데, 여기에 "제갈 궁경지, 산수양번성"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난양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나타난 것이다. 근데 정말 웃긴 건, 제갈량의 출생지는 이러한 궁경지 논쟁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제갈량의 출생지는 현재의 산둥성 린이시. 결국 린이시는 '제갈량문화관광지구'를 설치, 4평방킬로미터 내에 와룡산과 제갈량이 태어난 생가 등을 복원하고, 이후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해서 산업을 유치한다.
하여간 이 궁경지 논쟁에서 샹양과 난양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샹양의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 사이에 샹앙은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이때 일본 대기업의 상무가 제갈량의 광팬이라 나중에 이곳에 이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공장이 샹양에 지어지고, 융중을 개발해서 국가관광단지로 만들고 8~10억 위안의 매출을 올릴거라고 계획하고 있다.
난양의 경우 무후사를 기점으로 한 와룡강문화관광산업단지를 건설했는데 2015년의 매출은 14.35억 위안에 이르렀다. 거기다 이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2만여 명, 그 부수효과로 취업하는 사람은 8만 명에 이를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샹양시의 경우엔 아예 시내에 제갈량 광장을 만들어 놓고 제갈량 동상을 세워놓았다.#[25]
한편 위촉오 삼국사의 저자 허쯔취안은 '융중은 동한 말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남양군 등현[26] 소속이지만 현재는 양번시(2010년 이후 양양시) 소속이다'라며 논쟁을 일축했다.
14. 미디어 믹스[편집]

1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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