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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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승상
諸葛亮
제갈량

시호
충무(忠武)
작위
무향후(武鄕侯)
최종직위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1]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제갈(諸葛)

(亮)

공명(孔明)
신장
184cm[2]
아버지
제갈규(諸葛珪)
생몰연도
181년 ~ 234년 10월 8일 (양력)
181년 ~ 234년 8월 28일 (음력)[3] (향년 53세)
고향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사망지
오장원(五丈原)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촉한
(유비

유선)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
→군사장군(軍師將軍) 겸 서좌장군부사(署左將軍府事)
→승상(丞相)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1]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우장군(右將軍) 겸 행 승상사(行 丞相事)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1. 개요
2. 상세
10. 사상
11. 여담
12. 궁경지 논쟁
14. 관련 문서
1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 후한 말에 태어난 인물로, 촉한의 초대 승상을 지냈다. 당대 최고의 재상이자 전략가였으며, 탁월한 능력뿐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과 충성심으로 당대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등 중국 역사에서 훌륭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범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는 공명(孔明),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시호충무(忠武).


2. 상세[편집]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이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쓰고 있다.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생전에 승상이었으므로 상국은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국은 최고 재상인 승상의 상위 버전으로, 왕보다 높고 황태자와 같은 급이며 황제 바로 밑인 엄청난 벼슬이다. 상국이라는 직책이 워낙에 엄청나다 보니 제갈량 이전에는 전한소하, 조참, 번쾌, 여산, 후한동탁만이 이 지위에 올랐다. 다만, 여산은 여씨 일족의 후광으로 얻었고,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빼앗은 직위라서 제대로 된 상국은 사실상 소하, 조참, 번쾌, 제갈량 네 명뿐이다. 더불어, 제갈량 사후에는 촉한에서 상국은 물론이고 승상도 영구 결석이 되면서, 멸망 때까지 승상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4]

정사를 기준으로 단순한 사실들만 보면 제갈량이 칭송받는 게 의아할 수 있다. 제갈량은 관우장비, 황충 같은 무력이 뛰어난 장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산귀모의 신비한 책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더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행정관 중 하나였다는 점에 있다.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경제를 중흥시켜 국력을 증진시켰으며 이로 인해 이릉대전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촉은 수차례 북벌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흔히 소설이나 미디어의 영향으로 뛰어난 전술 및 계략이나 압도적인 무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을 비롯해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전근대 전쟁에서는 현대전에 비하면 전술적인 대승 몇번만으로 병력 차이와 국가 체급 차이를 뒤집고 전쟁에서 이겼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변수에서는 병력이 적은 쪽이 지형적 이점과 군대의 질 등에서 상당한 우위를 차지하고 운도 많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양쪽의 다른 변수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으면 병력 차이를 뒤집는건 매우 힘든 일이고 그 병력 차이를 효과적으로 벌리고 유지할 수 있는 행정과 보급은 전근대 전쟁에도 매우 중요했다. 한니발 바르카, 항우, 사자왕 리차드 1세 등 뛰어난 전술적 능력이나 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서 패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5][6][7]

컴퓨터나 통신체계 심지어 인쇄술도 발달하지 않았던 삼국시대에 보급체계를 운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엄청난 난제이다. 이것은 제갈량이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부분이였다. 그는 부대 내에서 최적의 보급과 운용을 할 수 있는 이동체계를 항상 고민했으며 진영을 세울 때도 늘 정교하고 화려하게 구축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다 높은 확률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북벌 당시 제갈량에 맞서 싸웠던 위나라가 압도적인 국력과 훌륭한 사령관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와 정면대결을 회피하거나[8] 야전에서 맞붙었을 경우 대부분 패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며[9], 사마의가 제갈량 사후 오장원에서 후퇴한 촉군의 진영을 보았을 때 천하의 기재라며 감탄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재능은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에서 제갈량을 부각시키기 힘들었던 부류의 재능이므로, 나관중은 신비한 책사 모습의 제갈량을 강조하였다.

또한 제갈량은 단순한 전쟁 사령관이 아니라 촉한의 최고 재상이다. 그것도 군주인 유선이 무능해서 국가 원수로서 행해야 하는 의례 및 외교 상의 업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무는 모두 제갈량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전쟁만 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직접 경영한 사람이다. 제갈량은 전쟁을 위한 일이 아닌 일반 내정에서도 유능하고 공정했던 점이 후대에 높이 평가 받는 요인 중 하나이다.

결정적으로 제갈량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충성심이다. 제갈량의 시호인 충무후(忠武候)를 보면 알 수 있듯 제갈량의 충성심은 예로부터 끝없이 칭송받았다. 유비-유선 2대에 걸쳐 촉한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실행했던 그는 조조에게 여러번 회유를 받았지만, 그야말로 죽어서 그만둘 때까지 삼고초려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계속 유씨를 섬겼다. 티끌 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나라를 위해 두 번이나 출사표를 올리며 몸을 아끼지 않은 채 북벌을 벌였으니, 이것이 제갈량의 군재(軍才)나 행정력을 낮춰보는 사람은 있어도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나 묘사가 있지만 후출사표의 표현인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와 삼국지연의의 대사인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 그의 삶을 압축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제갈량의 북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추풍오장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추풍오장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연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삼국지연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인간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인간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업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업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관련 일화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일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사상[편집]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 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명협 교수는 저서 《제갈량 평전》에서 이글, 「논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이 지은 글인) 「논제자」는 선진 시대 대표적 학문이었던 유가와 묵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자』의 「해폐편(解蔽篇)」은 유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나 묵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갈량이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경향이 드러난다. 그는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주의 많은 명유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가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묵가의 절용(節用)과 절장(節葬) 및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경향도 제갈량이 높이 쳤다. 이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를 학문의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은 듯하다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이렇듯, 여명협 교수는 저서를 통해 제갈량의 「논제자」가 『순자』 「해폐편」에서 탈태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에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계자서》(誡子書)


한편 《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의 50번째 챕터와 《제갈량 평전》은 제갈량의 계자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명협 교수에 따르면 '담박'과 '영정'이라는 어휘는 비록 단어는 달라도 고요함을 위주로 하는 도교 사상과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마음의 자세' 를 반영했다는 청정무위의 수신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10]


11. 여담[편집]


  • 헌제와 생몰년이 동일한, 181년 출생 234년 사망이다.


  • 한국에서도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11][12]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13]로 부르는 식.

  • 책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갈량의 체격이 왜소했을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제갈량의 신장은 8척(삼국지 시대 기준 1척=22.7cm)이었다고 한다.[14]

  •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亮少有逸群之才,英霸之器,身長八尺,容貌甚偉,時人異焉.)."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또한 연의나 민간전승에서는 흰 피부에 입술이 붉었으며 자태는 신선과도 같았다고 묘사되는데 흰 피부와 붉은 입술은 미인을 상징하는 용어인데자가 신선같은 외모는 절세미남을 상징하는 단어다. 주유, 손책 등과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엄연히 삼국지의 공식미남 중 하나다. 여담으로, 재미있게도 위, 촉, 오 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15]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모티브인 캐릭터나 삼국지 기반 창작물 속 제갈량은 거진 미남 설정이 붙는다. 고우영 삼국지나 이충호 삼국지 같은 일부 창작물들에서 이 점을 반영해서 마치 여성 캐릭터처럼 아름다운 외모로 묘사되기도 한다. 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처럼 성별이 진짜로 바뀌어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 관우의 상징이 수염, 청룡언월도, 적토마, 춘추좌씨전이라면 제갈량의 상징은 학창의,[16] 윤건,[17] 백우선,[18] 사륜거.[19]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동진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과 태평어람 인용 촉서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 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의 이런 이미지가 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완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20],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태평어람 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와 집본(輯本) 제갈량집으로, 현재 남은 집본(輯本) 제갈량집은 청나라 시대 인물 장주(張澍)가 제갈량의 남은 문장, 편의십육책과 장원,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등을 모은 책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단독으로 입전(立傳)된 인물은 제갈량과 육손뿐이다. 진수는 제갈량전 본문에 11,722자를 사용했으며 마지막 평왈(平曰)에서는 천여자로 제갈량을 평했다. 거기다 배송지는 3000자의 주석을 달았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온다면, 제갈량전 보다 분량이 많은 건 무제기, 문제기 정도 뿐이고 선주전 보다도 양이 많다고 하면 이해가 될 듯.[21]

  • 후출사표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22][23] 사실 후출사표가 위작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사표 참고) 제갈량 본인이 이 말대로 살다간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이 말대로 촉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말에 걸맞는 말년을 보냈고, 그 행보를 보면 여러모로 그가 죽은 원인이 과로사 혹은 과로로 인한 병사라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 승상이란 사람이 이러니 아랫사람들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 촉나라의 관리들은 과로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농담조로 제갈량이 누군가를 일처리 좋다고 칭찬하면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라고 할 정도. 사실 체력적인 측면에서 제갈량이 약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도 있는데 정계와 군부를 총괄하는 승상/대장군직까지 가 보지도 못한 동윤이나 법정, 양홍 같은 사람들까지 픽픽 쓰러지는 게 일상이요, 제갈량이 후사를 맡긴 장완조차도 군사 지휘 업무를 분리한 채 정무와 전략 입안에 주력했으나 역시 10년 버티나 마나 하다가 사망했다. 그 외 오의나 장억을 비롯 군사 업무에서도 업무를 못 버티고 사망하거나 몸 망친 사람들이 다수. 그런데 제갈량은 저들이 맡은 모든 업무들, 즉 장완의 치적 및 군사 전략적 업무 + 강유의 군대 지휘 + 동윤과 법정의 관리 감찰 및 행정 절차를 오로지 혼자 총괄하면서 10년을 버텼다. 이 기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긴 시간이다. 이건 절대 저질체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융중에서 농사일로 다진 체력이 있었기에 그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 50대 사망은 단명이라 보기도 어렵다. 훨씬 후대인 조선의 왕들도 50을 넘긴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 창작물에서는 초주가 제갈량에게 딴지를 거는 네거티브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북벌을 반대한 적이 없었고, 제갈량이 사망하자 가장 먼저 달려간 인물이기도 하다.[24]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주가 제갈량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고 본인은 현재까지 평가가 갈리는 중이다. 자세한 것은 초주 문서 참고. 제갈량의 경우 특별히 초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보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초주가 제갈량을 만나러 찾아오자, 키는 8척이지만 얼굴은 추했던[25] 그의 외모를 본 사람들이 모두 킥킥거리며 웃어대었다. 초주가 나간 후 법의 집행관이 웃은 자들을 처벌하자는 이야기를 올리자 제갈량이 나도 웃음을 참기 어려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냐?라며 처벌 없이 넘어간 것.솔직히 승상님도 웃었잖아요.

  • 현대에 와서는 주군인 유비보다 더 인기인이다.[26] 성도의 사당을 가봐도 유비의 사당보단 제갈량의 사당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승상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며 무후묘에 피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실제로 무후사는 지진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사천 지방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사천 분주보다 하북 분주가 낫다'는 말과 '제갈량은 얼간이다'라는 말을 하면 사천 사람들은 못참고 뛰쳐나와서 싸운다고...

  • 한국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시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의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 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 원나라 시절 연극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고[27]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명나라 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제갈량을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 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 잡혀버렸으니, 이에 사람들은 즙을 짜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청나라 옹정제 시절, 옹정제는 권신인 융과다를 숙청하기 위해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였는데, 개중에는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180218_1332372819.jpg

  • 위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28]이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이다. 조상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 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 이름 '량()'은 한자문화권에서 이름에 자주 쓰이는 글자 중 하나로 당대부터 이미 널리 쓰였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사마의의 3남인 사마량과 손오의 2대 황제 손량. 지금도 한자문화권에서 종종 쓰이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나라는 의외로 일본. '료'라고 읽히며 남자 이름이 외자로 료라면 십중팔구는 涼、亮、良 정도 중 하나. 복성이나 세 글자 이상의 성도 심심찮게 있어 외자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적 배경과 삼국지의 인기가 한몫한다.


  • 일부 사람들이 향료이자 약재인 정향의 효능을 설명하기 위해 그에게 구취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조조로부터 계설향(鷄舌香)을 받은 것도 그래서라고. 하지만 이건 근거없는 낭설이고,[29] 실제로 조조에게 계설향을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정향이 군주를 가까이에서 알현해야 하는 고관들이 썼다는 것에서 조조의 심중을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일화 문서를 참고할 것.

  • 소설 삼국지에서 중국의 남쪽 지방을 정벌하는 남만 정벌로 불리는 부분에서는 사람의 머리(수급)을 쌓아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사람 머리 대신에 만두를 쌓아놓고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나와[30]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의 바탕이 되었다.

  • 좌천된 인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상당히 천재적이었다. 요립이나 이엄등이 불평 불만을 할까봐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재등용해서 아주 중히 써 주겠다라고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 때문에 요립과 이엄이 상당히 조용했다. 반면 제갈량이 사망한 이후 좌천된 양의는 제갈량처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위나라 귀순 드립을 하다가 결국 서민으로 강등당했고 그러고도 불평 불만을 그치지 않아 결국 성도로 압송당하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 알고 보면 인간성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오죽하니 그 위연양의조차 제갈량의 낯을 봐서 (적어도 제갈량의 면전에서는) 싸우지 않고 있었을 정도이며 이엄이나 요립 등 좌천된 인물들이 전부다 제갈량의 낯을 봐서 모반을 일으키지 않고 꾹 참았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촉나라의 문무백관들이 더럽고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제갈량을 봐서 참는다인 경우가 매우 많았을 정도였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제갈량의 매력이 최고 수준으로 높은 것은 실존 인물 제갈량의 착한 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 급부로 이게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는데 위연은 후퇴하라는 제갈량의 생애 마지막 명령이자 유언을 어기고 지 마음대로 돌격했으며 양의는 위연을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비의의 명령을 어기고 지 마음대로 위연을 죽여버렸다. 이후가 더 가관인데 양의는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씨를 따르겠다[31]고 말하는 바람에 서민으로 강등당한 뒤 벽지에 유배되었는데 모반을 일으키려다 적발되어 검거되었고 그걸 추궁하기 위해 성도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저승으로 도망쳤다.

12. 궁경지 논쟁[편집]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신은 본래 남양땅에서 밭갈며 지내던 미천한 백성이라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성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번이나 소신의 초옥을 찾으시어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 중에서


왜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느냐면 제갈량 사후 이 "밭갈며 지내던" 남양 땅이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직접 밭 갈던 곳을 '궁경지'라고 칭하는데, 동양권에서 삼국지의 인기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 고금을 막론한지라 이에 따른 관광 산업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32] 궁경지 논쟁에서 그 후보는 두 군데로 압축이 되어있는데 한곳은 후베이성샹양(양번), 또 한 군데는 허난성난양이다.

원래 궁경지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논쟁으로 삼국시대 이후 육조~남송까지 현재의 남양이 남양 완현이라는 기록이 없는데, 이후 원나라의 남양현지, 남양부지 같은 자료가 남양 완현이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번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시한다.

1. 서서, 최주평, 석도, 방통, 마량, 방덕공, 황승언 등은 양양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거기다가 제갈량의 큰누나는 양양 호족 괴기의 부인이 되고, 작은누나는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의 부인이 되었는데, 만일 현 남양에서 살고 있었다면 120km나 되는 길을 단시간 내에 왕복할 수 있겠는가?
2. 유비의 영지였던 신야에서 융중까지는 60km로 멀지 않지만 남양은 70km라 1일 이내로 왕복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남양과 완현은 장수, 조조, 유표간 전투가 자주 벌어진 곳인데 과연 여기서 한가롭게 농사를 지을 수가 있나?

이러한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양번 융중을 제갈량의 궁경지로 인정하고 있다. 거기다가 같은 하남성 출신 사학자들마저도 양번 융중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번도 약점은 존재한다.

1. 제갈량전 주석에 인용된 이흥이 쓴 제갈승상고택갈표에는 제갈량의 고택을 면지양, 북쪽에 물이 있고 남쪽에 산이 있다라고 본다면, 면수 이남의 융중은 이에 맞질 않다.
2. 현 융중은 강희년간에 만들어 졌고, 명 양양왕의 묘가 융중에 있다.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면 왜 여기다가 묘를 쓰냐?
3. 악비는 남양 무후사에서 출사표에 대한 제발문을 썼는데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가 남양이 아니면 뭐하러 여기다가 제발문을 남기겠는가?

이러한 양 지역의 첨예한 갈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마음은 조정에 둘 뿐, 선후주를 구별하지 않아 이름이 천하에 드높으니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는가.


청나라대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이 남양 지부로 부임할 때 어떤 사람이 고가형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물었을 때 쓴 시로 고가형은 저런 시를 쓰면서 진땀을 빼며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양 지역간의 제갈량이 밭갈던 곳이 어느 곳이냐 논쟁은 쉬이 가라앉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 1990년에 중국 정부가 여기에 기름을 더 부어버렸다. 한국의 우체국격인 중국우정이 삼국연의 특종우표 2세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1장이 삼고초려였다. 그리고 이 우표의 최초발행지를 결정하는 와중에 샹양과 난양끼리 서로 다투다가 결국 두 곳에서 각자 최초발행식을 치르게 했다. 거기다 2003년 중학교 어문교재에다가 10년 전에 삭제한 융중대를 실었는데 여기에 주석으로 융중은 산 이름이며 현재 후베이성 샹양에 있다고 적어버려서 활활 타는 기름에다가 폭약을 하나 던졌다. 이에 난양 사람들 1만 명(!)이 서명하는 항의행사까지 있었다.

2008년엔 활활 타다 못해 폭발한 이 불구덩이에 중국 관영언론 CCTV가 핵폭탄을 하나 더 던져넣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샹양의 도시광고를 내보냈는데, 여기에 "제갈 궁경지, 산수양번성"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난양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나타난 것이다. 근데 정말 웃긴 건, 제갈량의 출생지는 이러한 궁경지 논쟁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제갈량의 출생지는 현재의 산둥성 린이시. 결국 린이시는 '제갈량문화관광지구'를 설치, 4평방킬로미터 내에 와룡산과 제갈량이 태어난 생가 등을 복원하고, 이후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해서 산업을 유치한다.

하여간 이 궁경지 논쟁에서 샹양과 난양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샹양의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 사이에 샹앙은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이때 일본 대기업의 상무가 제갈량의 광팬이라 나중에 이곳에 이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공장이 샹양에 지어지고, 융중을 개발해서 국가관광단지로 만들고 8~10억 위안의 매출을 올릴거라고 계획하고 있다.

난양의 경우 무후사를 기점으로 한 와룡강문화관광산업단지를 건설했는데 2015년의 매출은 14.35억 위안에 이르렀다. 거기다 이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2만여 명, 그 부수효과로 취업하는 사람은 8만 명에 이를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샹양시의 경우엔 아예 시내에 제갈량 광장을 만들어 놓고 제갈량 동상을 세워놓았다.#[33]

한편 위촉오 삼국사의 저자 허쯔취안은 '융중은 동한 말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남양군 등현[34] 소속이지만 현재는 양번시(2010년 이후 양양시) 소속이다'라며 논쟁을 일축했다. 둘 다 맞으니까 그만 좀 싸우라고


13.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관련 문서[편집]




15. 둘러보기[편집]


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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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선 태자 책봉문에 따르면 사지절(使持節)이다. 가절보다 사지절이 더 권위가 높은데 가절은 평상시에는 사람을 처분할 권리가 없고, 전시에는 군령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사지절은 평상시 및 전시 가리지 않고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중간에 지절이 또 있으며(평상시에는 관직이 없는 사람을 처분할 권리가 있고, 전시에는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죽일 권리가 있다.) 가장 끝판왕으로 가절월(앞서 얘기한 절을 가진 장수를 죽일 수 있다.)이 존재한다. [2] 키가 8척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cm로 계산하면 184cm가 나온다.[3]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단 헌제는 3월, 제갈량은 8월에 사망했으며 헌제의 사망 당시 제갈량은 5차 북벌군을 이끌고 북진 중이었다.[4] 다만, 제갈량의 경우는 유비가 상국의 지위를 내렸다는 부분 이외에는 기록에서 거의 승상으로 불리기 때문에, 군주의 신뢰를 얻었다는 일종의 명예직일 가능성도 있긴 하다.[5] 한고제 유방이 일등 개국공신을 소하로 정했을 때 장수들이 반발하자 유방은 장수들을 사냥개, 소하를 사냥꾼에 비유하며 장수들이 공훈을 세울 수 있던 건 소하의 보급과 행정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일침을 놓자 장수들은 그제서야 조용해졌다는 일화가 행정력의 중요성을 알려준다.[6] 사실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에서 무승부다. 항우도 약탈을 했는지 도대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진나라가 곳곳에 모아둔 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항우의 경우 팽성에서 성고, 형양까지 용도를 통해 운반해서 군대를 먹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팽월의 게릴라전에 매우 취약했다는 약점이 있었다. 오히려 유방이 진나라가 모아든 곡식을 군량으로 사용했는데 유방의 초한대전 당시 거점이었던 성고, 형양은 진나라가 천하의 곡식을 모아놓은 오창과 가까웠다. 그리고 성고, 형양이 계속되는 항우의 공격으로 못쓰게 되자 오창과 가까운 광무산으로 옮겨서 저항을 계속하였다.[8] 물론 촉의 보급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을 겨냥한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 역시 군량 보급에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애초에 촉군이 그저 그런 삼류 군대였으면 저렇게 전면전을 회피하며 시간을 끌기보다 아예 초전박살로 금방 끝내버리는 쪽이 편한데 그러지 못했다.[9] 당대 위나라 최고의 지휘관이었던 사마의 역시 제갈량이 지휘하는 군대와 두 차례 맞붙어 모두 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 문서를 볼 것.[10] 그래서 성도 무후사의 제갈량 사당이자 정전인 정원당(靜遠堂) 대들보에는 '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이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11]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성을 붙일 때는 X량이라고 해야 한다. 제갈량은 성이 제갈(諸葛)씨이고, 이름이 '량(亮)'이기 때문. 그러나 X량이라고 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자수도 맞지 않기에 X갈량이라고 표현하는 듯.[12] 예를 들어, 프로듀스 101 시즌2황갈량이나 KBO 리그염갈량 그리고 프로듀스 X 101싸갈량 [13] 이후락의 별명이 제갈조조였다. 뒷쪽의 조조같은 시대의 그 조조다.[14] 연의 기준으론 9척인 관우나 10척인 여포 등 더 큰 사람들이 많고 장비 등 8척 장신들이 넘쳐나지만, 저들은 모두 정사에 기록된 신장이 없다. 정사에 기록된 인물들 중 최장신은 8척 3촌인 정욱이고, 8척이란 언급이 인물 자체가 제갈량, 허저, 조운 등 소수이고 7척 5촌 유비, 7척 7촌 태사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즉 제갈량은 당시 기준으로 최장신이었다는 것.[15] 물론 당시 명문가 출신들이 모두 외모가 뛰어났다고 평가받지는 않은 만큼 타고난 유전자 빨이 제일 중요하겠다만, 셋 모두 다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관리를 받아 외모가 준수하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나마 제갈량의 경우 셋 중 가장 집안이 딸리고 20대 초중반 시절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둘보다는 고생을 좀 했다.[16] 학창의는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덕망이 높은 학자가 연거복(燕居服)으로 입었던 것으로,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진 웃옷이다.[17] 비단실로 짠 두건(頭巾). 은자(隱者)가 쓰는데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등용된 뒤에도 계속 썼다 함.[18] 흰 새의 깃을 모아서 만든 부채.[19] 바퀴가 넷 달린 수레.[20]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21] 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22] 온 마음의 정성 몸이 부숴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23] 이 말은 뒷날 강희제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던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24] 다만 이막처럼 막나가는 게 아닌 이상 눈치가 있다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것이 도리다. 거기에 제갈량은 촉한 정치판 최고의 거물이었다. 정치적 쇼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유선이 가지 못하게 조서를 내렸다고 하지만 유선의 조서를 무시한 것이 아닌 그저 조서가 내려지기 전에 출발했기에 도달한 것뿐이었다.[25] 정사에는 용모가 소박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진수와 초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추남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돌려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기 현대에도 외모가 별로라고 여겨지는 사람한테 대놓고 '너 못 생겼어'라고 말하는 건 인간관계 단절 및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착하게 생겼네' 등으로 돌려서 말하는 사례와 다르지 않다. 이 일화만 보아도 초주의 외모는 자리에 모인 모두가 웃음을 참기 어려워 했을 정도였으니.[26] 국내에서도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유관장이나 조조, 손권 다음으로 제갈량 정도는 상당히 많이 아는데 바로 출사표의 주인공이 제갈량이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에다 출사표를 검색하면 그냥 하루에도 몇 건이 뉴스에 올라올 때가 많은데 이는 정치인의 출마나 아니면 다른 분야의 유명인들이 어떠한 결심을 하거나 특정 기업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도 '출사표'에 빗대는 기사가 굉장히 많다. 그리고 머리가 좋거나 지식인들에게 자주 비유할 대상으로 제갈량을 빗댄다.[27] 정확히는 유비가 황제가 돼서 3년밖에 못 산다는 걸 알고(과거 연극의 제갈량은 도사로도 표현되었다) 망설이지만, 유비의 아들이 있다는걸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근데 그 놈이 자기 발목 잡을 줄은 몰랐겠지[28]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29] 저 링크에서는 조조가 적국의 재상인 제갈량을 조롱하기 위해 정향을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실제 제갈량이 재상인 승상이 된 것은 조조가 죽은 후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조조는 위왕으로 죽었고 그 아들 조비 대에 이르러서야 선양받아 위나라가 황제국이 됐으며, 그 이후에 한 황실 복원을 명분으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면서 제갈량을 승상에 임명했기 때문.[30] 하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정사에 기록할 만한 내용은 아닌 상대적으로 사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31] 정황 상 위나라에 귀순하겠다에 가깝다. 양의가 위연을 따르겠다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되는 것이다.[32]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지역 분쟁이 있었는데 정몽주의 출신지를 두고 영천시포항시가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다만 이쪽은 문헌상으로는 영천시 출생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 역사적 유명인의 고향이나 연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지역분쟁은 한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종종 벌어지는 현상이다.[33] 전근대 기준으로 하면 번성 쪽이다.[34] 등현 자체가 남양군에서도 최남단 지역이다. 여기서 한수를 건너면 바로 (남군)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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