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신문 (문단 편집) == 상세 ==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1898년)|매일신문]]》 시절처럼 순국문체로 쓰였으며 민중계몽과 일반 대중이 타겟이었다. 1면에는 논설, 2면에는 잡보[* 현재 신문의 사회면과 비슷하다.], 3면에는 국내외 정세, 4면에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승만]], [[유영석]], [[이종일]] 3인이 주동이 되어 창간하였으나 이승만은 한달도 못되어 [[만민공동회]]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고, 유영석은 개인 사정상 퇴사하여 한동안 이종일 단독으로 사장과 기자 역할을 하며 운영하였다.[*a 뎨국신문, 1907년 6월 7일, 「본사의 행복과 본 기자의 해임」][*b 뎨국신문, 1907년 6월 14일, “남대문 밖 원경민씨가 보낸 글”, 통권, 제2430호] 《제국신문》은 발행 당시 [[대한제국]]과 외세의 수탈 야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외세와 조정의 법적인 탄압이 심했고[*b ][* 외세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쓴 기자를 연행하고 기사를 삭제하는 등 횡포가 만연했었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제정한 신문지법[* 조항 중 보증금 납부 조항이 있었다.]과 시스템 미비[* 당시 인쇄비 때문에 신문의 가격이 비싼 편이여서 대중들은 섣불리 [[돈]]을 꺼내기 힘들었다. 비슷한 시기 발행되었던 《[[독립신문]]》의 창간 당시 반 단(14행) 기준 구독료가 1년에 1원 30전, 1달에 12전, 1장에 1푼이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서재필]]은 싸게 매긴 가격이었는데도 신문값이 너무 비싸다며 항의 편지를 쓰는 독자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화폐 개념에 대한 대중의 무지와 운송 시설의 미비가 겹쳐 제국신문 뿐만 아니라 구한 말 시절의 신문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로 인해 [[광고]] 수입과 구독료를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자 결국 경영난으로 1907년 9월 20일에 휴간에 들어간다. 이후 독자들이 의연금을 보내는 등 각종 지원으로 같은 해 10월 4일에 간행을 다시 시작했으나 결국 각종 여건의 문제로 1910년 6월 10일 다시 휴간에 들어가 결국 이 해 8월 2일에 폐간하고 만다. 종간 당시 《제국신문》의 발행 호수는 약 3,240호였다. 《제국신문》은 대중 친화적인 노선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