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승방략 (문단 편집) === [[임진왜란]]과 제승방략의 붕괴 === 제승방략으로 완전히 개편된 것은 선조 중엽이었고, 이 체제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외적의 침입은 임진왜란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이 체제는 무너진다. 꽤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데, 임란 초기에 병력이 제때 모이지 않았다거나, 장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각지의 병사들은 제때 결집했고, 각종 물자류 [[보급]] 또한 수량 및 품질의 관리가 기본은 되어 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졸전으로 평가받는 [[용인 전투]]에는 무려 '''5만명'''이나 모였다. 이는 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 기준으로 2~3배 규모라고 보면 된다.] 이는 조선의 우수한 행정 체계의 힘이다. 하지만 병사들의 훈련도는 그에 따르지 못했다. 거기다 최일선이었던 [[경상도]]의 경우, 일본군 침입 당시 경상 순찰사 김수는 [[대구광역시|대구]]에 경상도 병력을 모으고 이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대구에 당도했으며, 결국 대구에 모였던 경상도군 주력 부대는 전투 한번 못해보고 자체 해산되었다. 정작 이일이 상주에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코앞에 있었고,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경상도군은 없었다. 그래도 이일이 왔다는 소식에 다시 병력이 결집하여 6천여명의 군을 이루었지만, 결국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4014_008|패배]]. 교전 직전 이일이 하던 것은 습진, 즉 진 짜기 훈련인데, [* 기관총과 현대식 화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진 짜기가 매우 중요한 전술 능력이었고, 근대의 전열 [[보병]]이 위세를 떨친 것 역시 총기의 낮은 신뢰도를 만회하기 위해 과거의 진형을 그대로 적용한 것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맹활약하기까지 진형은 전술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현재에도 병역 자원이 훈련소에 입영하여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제식훈련]]이다.] 진형 자체가 해당 병력의 전투력 자체였으므로, 그것조차 제대로 짜지 못한다는 건 기본적인 전투력 자체도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았다는걸 뜻한다. 이들이 말 그대로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민간인]] 수준임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후에도 낮은 훈련도는 [[센고쿠시대|내란]]으로 단련된 일본군과의 맞대결에서 끝까지 문제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측은 몇차례에 걸처 만 단위 이상의 병력을 집결해 일본군과 야전을 시도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용인전투]].]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겹치면서 붕괴되고, 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함경도를 장악하고 [[만주]]까지도 일부 부대가 침입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이 겹친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에서의 경상도 군 해산, [[이일]]이 패한 [[상주 전투]], [[신립]]이 지휘하여 싸그리 전멸한 충주 [[탄금대 전투]]라 하겠다. 현령이나 현감 등의 지역 지휘관들의 자질에도 큰 문제가 보인다. 전란 초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열심히 싸웠으나, 용궁 현감 우복룡은 하양 군사 수백 명이 단순히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위해 죽였다. [[징비록]]에 상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양 군사들은 소집 명령에 따라 집결지인 대구로 서둘러 가는 중이었다. 우복룡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으니 너희가 역적 모의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꾸짖자, 하양 병사들은 공문을 꺼내어 변명하려 했으나, 우복룡은 일방적으로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고 상부에 반란을 일으키려던 하양 군사들을 토벌했다고 보고했다.[* 우복룡의 이같은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원균]]이 조선 백성 민간인 머리를 잘라 수급이라고 보고한 짓 처럼 조선 지휘관들 중에서 종종 보여지던 행위였다.] 경상 감사 김수가 이를 공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가 되었다. 졸지에 유가족이 된 하양의 [[과부]]들과 [[고아]]들이 사신이 올 때마다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이미 명성이 있어서 이들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 일로 인해 광해군 때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402012_001|파직된다]]. 신립이 [[삼도순변사]]로 임명돼 이일의 뒤를 따라 남하 준비를 할때에도 마찬가지 문제는 발생한다. 우선 군관을 구하기 힘들었다. 신립이 지휘해야 하는 부대의 장부상 규모는 10만여에 달했으며, 이를 장악하고 통제하려면 그만큼 많은 군관이 필요한데 그걸 구하기 힘들었던 것. 또한 자신이 지역 군과 합류하기 전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을 대비해야 했다. 신립이 임지로 향하면서 인솔한 군관은 88명 뿐으로, 하급 지휘관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일 본인도 지원 병력으로 함께 남하할 정예병을 뽑고자 하였으나, 징병 문서에는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유생들 뿐이어서 3일을 지체하다가 결국 뽑지 못하고 먼저 남하하며 별장 유옥을 남겨 병력을 뽑아 뒤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3일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대구에 모인 경상도 병력이 와해되기 전에 병력을 인수하여 대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립은 경군을 자신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이일보다 뒷빽이 든든했던데다 당시 조선의 제일가는 장군이였던 신립의 요청이니만큼, 결국 조정에서는 법도까지 어겨가면서 선조가 직접 나서 경군을 차출한다. 체찰사로써 남하할 것을 준비하던 [[류성룡]]이 지휘하기 위해 편성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로 돌린 것.[* 류성룡은 이에 대해 징비록에 '''신립이 모으려 하니까 안모여서 내가 나서서 모았다'''고 적어놓았다.][* 장사라 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경군과 갑사에 준하는 병역 경험이 있는 훈련된 병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전마가 1필씩 지급된 것으로 보아 [[승마]] 경험이 있는 병력으로 볼 수 있고, 모든 인원에게 전마가 지급되었다는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참하관도 상당수 포함된 인원이라 보아야 타당하다. 즉 현대의 [[기갑여단]] 수준의 병력을 붙여준 셈.][* 무과 급제자들은 당연스럽게 승마술이 기본 소양이었고, 북방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갑사들의 경우도 여진족을 상대하였으므로, 이들은 기병으로 복무한 경우가 흔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과 조우한다. 이때 신립은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군대의 극히 일부분인 충청도군([[연려실기술]]에 따르면 8천)과만 합류했던 상태였고, 북상하던 전라도군과는 미처 합류하지 못했었다.[* 근데 이쪽과 합류 못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병력들은 나중에 용인 전투, 이치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쪽에 있던 인물들 중 하나가 [[권율]]임을 생각하면... 이때 합류했다가 신립과 함께 전멸했다면 이후 반격전의 주축이 되는 전라도와 [[이순신|수군]]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을 수 있다.] 거기다 훈련도가 형편없는 군대의 상태는 [[조령]]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했으며, 조령으로만 적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3개의 진격로로 나뉘어서 한양으로 돌격하는 상황이라 빠르게 하나씩 [[각개격파]]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높은 기병의 비율을 믿고(일단 경군들에게는 한성을 출발할때 전마가 1필씩 지급되었다.) 야전을 걸었으나, 지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실책이 겹쳐 전멸당하고 만다.[* 싸움이 벌어진 [[달천(하천)|달천]] 평야와 [[탄금대]] 일대는 분명 평탄한 땅이었지만, 시기상 논농사가 시작된 때고 강변이었기 때문에 질퍽거릴 수 밖에 없어 기병의 기동력이 극히 저하되는 곳이었다. 또한 기록상 전투 초반에 적전 도주한 [[이일]]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충주성이 점령된 이후 조선군이 포위되어 출전했던 전 병력이 몰살당했다고 본다. 군사적 의미에서의 '전멸'이 아닌, 진짜 모조리 죽었다는 뜻의 '''전멸(全滅)'''을 한 것이다. 말을 탈줄 아는 장사 8천명 + 충청 지방의 소집병 8천명의 전사율이 99%라는 말이다.] 이런 혹독한 사태를 겪은 후에야 [[류성룡|류성룡(柳成龍)]]에 의해서 진관 체제의 재정비론이 거론되었고, 이후 지방에 [[속오군]](束伍軍) 등이 설치됐다. 하지만 속오군 또한 임시 방편이었던지라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대표적인 예가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이다], 양반 관료층의 토지 겸병 문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체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엔 없었다. 수도에 [[오군영]]을 두고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 이를 유지하는 체제로 갈 수밖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