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승방략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시기 나타난 문제점의 배경 ==== 북방의 대[[여진족]] 전략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조선이 가진 수많은 지리/정치/외교적 특이 조건이 죄다 악조건으로 작용하면서, 제승방략은 제대로 동작할 수 없는 기형적인 전략이 되었고, 가용 인력의 절반이나 징집에 성공한 것이 기이할 지경이었다. 제승방략 체제가 기존의 진관 체제를 대신한 조선의 국방 체제가 된 것은 [[니탕개의 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니탕개의 난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시대 최대의 외부 침략으로, 니탕개는 최대 2만으로 추정되는 여진족 [[중기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 때 신립과 이일이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사용된 전략이 니탕개의 난과 이후 대북방 전략에서 사용되었다. 대북방 여진 전략으로는 제승방략이 제대로 작동했다. 제승방략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전략이 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때이고, 실행자가 신립과 이일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면전]]과 북방 여진족 침투에 따른 [[국지전]]은 전혀 달랐다. 여진족의 병력은 중기병을 동원한 소수 정예에 가까웠고, 절대 상대하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적이었으나,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보병전에 대한 정석적인 투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이는 전면전 상황시 [[기동]]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조선의 상황은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의 동로마에 더 가까웠다. 기병 위주의 테마군을 운용한 동로마 제국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을 수 있는데, 보병은 오히려 전면전 상황시 공격적인 기동에 필수였다. 즉, 상대가 정석적인 조직화가 되어 있을수록, [[반격]]을 비롯한 공세를 펼쳐야 하는 상황일수록 보병의 중요성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서유럽의 기사 위주 전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인데, 사방에서 약탈꾼들이 침투하면서, 유목민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도로 조직화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이슬람 세력도 같이 있는 영향이 컸다. 또한, 서유럽의 기사 위주의 전투도 플레이트 아머라는 사기템의 출현에 따른 "기병 돌격으로 보병 방진을 박살내는" 기형적인 현상 때문이었지, 단순히 상대가 정예 기병 위주로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에는 용병 운용이 기본이었기에, 전문 보병 전력은 각종 용병대로 충당하였으므로, 보병이 버려진 것도 아니었다. 조선은 대여진 전략을 전면전 상태에서도 고수하였다.[* 조선은 분명히 왜란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보병 위주였기에 이미 먹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총기를 고려해도 아직 기병의 비중이 굉장히 큰 시기였기에, 제대로된 충격기병이 있었다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보병 상대로도 충분히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나, 당시 조선의 주력은 기병으로 기병을 잡는데 집중되어있어 충격기병이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제승방략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준 신립, 이일 등 장수들의 발상도 문제였는데, 북부 여인들은 남부 장정보다 나으니 북부 여자들을 징병하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기에, 조선 시대 하급 군관의 산실과도 같았던 북방에서는 장수만 있으면 농민들을 긁어모아도 정규병력에 준하는 병력이 나올 수 있었으나, 나머지 지역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신립/이일 등은 북방을 조선의 다른 지역과 동일시해버렸다. 더군다나 이들은 우수한 인적 자원이긴 해도 다른 지역 지리에는 문외한이었고, 한반도 남쪽에선 사방으로 우회해서 진격하는 왜군 상대로 정상적인 방어 계획 수립 조차 하지 못하고 헤매었다. 더군다나 지리에 무지하니 기병의 정상적인 운용조차 불가능했고, 이는 결국 신립의 대패로 이어젔다. 이러한 문제점이 대두된 정치/외교/지리적 이유를 살피면, 조선이 세력투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 외적은 북방에서나 침입했기에, 북쪽 말고는 [[육군]]을 보낼 일이 없게 되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우호적 관계가 되면서 전면전이 일어날 일이 없어졌다. 따라서 육상으로는 세력 투사가 불가능하니, 군사력 증강 의지를 일으킬 곳은 "해상"만 남게 되는대, 하필 명나라가 해금령을 때려 해상 무역을 봉인해버린 것이다. 이러니 군사력을 증강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조선 정부는 창업군주인 [[태조(조선)|태조]]부터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반란으로 [[고려]]의 실권을 잡은데다 그 태조도 결국 [[1차 왕자의 난]]이라는 반란으로 실권을 잃는 등 국가의 초창기가 반란으로 얼룩졌던 기억 탓에 광적으로 반란을 억제하려 했다. 제승방략 특유의 지휘관 파견제도 자체가 반란을 막기 위한 광적인 집착의 결과물이다. 동로마의 테마제도가 얼마나 많은 반란을 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현장에 동원권자를 두지 않는 것은 적절했으나, 제때 지휘관이 파견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할 텐데, 왜란 당시 쏟아진 수많은 "[[의병]]을 가장한 징집병"만 봐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훤히 보인다.[* 소집 병력이 지휘관이 오기전에 적을 만나 증발. 이후 의병장들의 노력으로 다시 모여서 의병이 된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반란억제 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이 지역 저 지역 부대를 막 섞어서 지휘체계를 꼬아놓는 행위는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문제는 [[신미양요 ]] 때 까지 이어져, (미군이 보기에) "포는 무시무시하게 잘 쏘는데 정작 육상 전투는 못하는" 해괴한 군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악조건을 우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면세 토지다. 전근대 국가에 있어 면세 토지의 증가는 곧 군사력의 증발이다. 로마 제국이 2천년 역사로 증명해보였고, 동로마가 최후를 맞은 후에도 프랑스의 그 악명높은 [[앙시앵 레짐]]으로 그 악독함을 찾을 수 있다.[* 서유럽식 해결법은, 정부가 [[빚]]을 엄청나게 진 다음 [[파산]]으로 넘기기인 경우가 많고, 그 대표주자가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재정 파탄이다.] 이 문제는 인류의 역사를 뒤엎은 인공 [[비료]]의 탄생 이전까지 완화될 기미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공산주의]]와 고전 [[자본주의]] 사상가가 입을 모아 그토록 증오한 것이 지주였고, 면세토지의 근원인 지주 문제의 영향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오직 농업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